오래전 회식자리에서 농담으로 “나는 박통 때문에 재미동포가 됐다”고 말했더니 동료·후배 기자들이 “해직기자냐?”며 경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신초기 박정희 독재정부의 언론탄압에 항거하다가 쫓겨난 기자들 가운데 한명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필자는 해직당할 만큼 용감하지 못했지만 당시 유신체제에 좌절해 있던 대다수 기자들이 그랬듯이 나름대로 현실일탈을 모색했다. 마침 1977년 본사가 국내 언론사중 최초로 시행한 기자 해외연수제도에 운좋게 1기생으로 뽑혔다. 미국연수를 끝내고 2년 후 귀국하자마자 박대통령이 암살당했고 정국은 더욱 경색됐다. 다시 2년이 지난 1981년 필자는 연수경력을 인정받아 미주지사(LA)에 파견발령을 받았고, 끝내 자의반타의반 재미동포가 됐다.
필자의 진로를 바꿔놓은 1977년, 이곳 시애틀은 한국과 달리 밝고 활기찼다. 그해 4월6일 지금은 헐린 킹 돔 구장에서 시애틀 최초의 메이저리그 야구경기가 열렸다. 매리너스는 이 역사적 첫 게임에서 캘리포니아(현 LA) 에인젤스에 7-0으로 완패했다. 그러나 6월에는 야키마의 한 부부가 기른 3년생 시골경주마가 벨몬트 대회에서 우승, 5월의 켄터키 더비와 프리크니스 대회에 이어 삼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2월엔 시애틀이 전국 대도시 가운데 강제 스쿨버스 통학제도를 통해 공립학교의 인종통합을 이룬 최초의 도시가 됐다.
쌍7년(1977년)은 뭐니뭐니해도 시애틀 한인들에게 큰 행운을 안겨줬다. 그해 오늘(11월10일) 총영사관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30회 생일을 맞은 시애틀총영사관은 이제 미국 전체면적의 1/4에 달하는 서북미 5개주(워싱턴·오리건·알래스카·아이다호·몬태나)를 관장하며 15만8천여 동포와 1,300만여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사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금은 시애틀총영사관의 존재가 너무나 당연시 되지만 당시엔 그렇지도 않았다. 올드타이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부는 총영사관 개설이 불필요하다거나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인수가 1만명이 안됐으므로 그럴 만도 한 데, 실은 일부 유학생들이 총영사관을 통한 군사독재정부의 통제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 인사가 귀띔했다.
그러나, 총영사관 개설을 가장 열망한 측도 유학생들이었다. 여권연장이나 갱신을 위해 꼬박꼬박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정서가 청와대에 보내졌고, 외교부는 남홍우 영사를 시애틀에 보내 총영사관 개설을 준비토록 했다. 남 영사는 이창희·서두수·전계상·김현길 씨 등 현지 한인인사들의 격려를 받아가며 현재의 다운타운 건물 사무실(2033 6th Ave. #1125)을 임대해 1977년 11월10일 총영사관 문을 열었다.
다음해 6월 장윤걸 초대 총영사가 부임했고 그 뒤를 이문수, 안세훈, 김흥수, 고창수, 이해순, 김 균, 손 훈, 문병록, 김재국 총영사가 이은 뒤 지난해 3월 권찬호 현 총영사(11대)가 부임했다. 시애틀총영사관은 외교관들의 선호경쟁 공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총영사 외에 영사 5명도 1당백의 실력파들만 배정된다. 교민행사에 ‘무소부재’ 로 참석하는 권 총영사 못지않게 영사들도 1인당 한국 전체면적의 5.2배 넓이를 관장하며 발로 뛰고 있다.
‘럭키 7’이 두 개 든 1977년에 개설해서인지 시애틀총영사관은 그동안 비교적 운 좋게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LA나 뉴욕처럼 유학생 병역비리에 연루되지도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흔히 듣는 ‘문턱이 높다’는 불만도 없다. 오히려 최근 자체 동포여론조사를 통해 ‘친절해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민원실을 대폭 개선했고 2년 전엔 본부로부터 영사활동 혁신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앞으로 30년간 더 큰 행운과 발전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생일을 맞아 예의를 갖추려고 덕담을 좀 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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