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왕국인 미국에선 ‘돈이 말을 한다(Money talks).’ 돈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 자녀에게 심부름을 시켜도 ‘돈부터 보여달라(Show me the money)’며 튕기기 일쑤다. 단골식당이라도 평소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허술하게 건네면 서비스가 시큰둥하다.
그런데, 돈만 입이 달린 것이 아니다. 수(數)도 말을 한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양가가족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면 설사 하객이 많지 않아도 넉넉해 보인다. 반대로 장례식장에서 상주가족이 한두 사람만 관 옆에 달랑 서 있으면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꽉 메워도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가족이든, 단체든 수가 많으면 자연히 파워가 생긴다. “자식은 화살과 같다. 그것이 전통(箭桶)에 가득한 자는 복이 있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성경구절도 있다. 스포켄은 타코마를 불과 400명의 인구차로 따돌리고 워싱턴주 제2도시로 행세한다. 히스패닉계가 크게 늘어난 LA에서는 멕시칸이 백인을 누르고 시장으로 당선됐다.
모든 중국인이 본보의 불우이웃 성금에 1센트씩만 기부하면 1,300만 달러가 모아진다. 중국인들이 고향으로 몰려가는 음력설엔 지구가 흔들린다거나, 13억 인구가 동시에 서해를 향해 방뇨하면 한반도가 떠내려간다는 우스개도 있다. 우리는 이미 중국인의 숫자 파워에 한이 맺혔다.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11월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했다. 그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없었다면 조국은 벌써 반세기전에 통일을 이뤘다.
워싱턴주의 한인은 숫자 파워에 약하다. 후하게 잡아봤자 12만여명으로 주 전체 인구(640만)의 2%에 불과하다. I-5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앞뒤 운전자 100명 중 한인은 자기 외에 한명 뿐이라는 의미이다. 수를 과시하기는커녕 평소 사람들 눈에 잘 띠지도 않는다.
수는 많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주류사회에서 눈에 띄는 한인들이 있다. 주 상하원 5선 경력의 신호범 상원의원은 부의장이 됐고, 페더럴웨이의 박영민 시의원은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연임이 아님)했다. 주 수석경제고문 직을 4반세기 가까이 맡아온 손창묵 박사는 올 11월 선거에서 주 재무장관직에 도전한다. 모두 한인으로서는 전국 최초의 일이다.
한인이 주류사회에서 단체로 눈에 띄는 일은 드물다. 한미연합(KAC)의 전신인 한인 유권자협회(KAVA)가 3년 전 창립총회에 기를 쓰고 인원을 동원했지만 1천명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도 그 숫자는 워싱턴주 한인사회의 최대 인원동원 기록으로 남아있다. 본보가 해마다 한우리 축제에 맞춰 페더럴웨이 한복판에서 개최하는 거북이마라톤도 참가자가 400명 선을 넘지 못한다. 건강증진과 함께 내세우는 ‘한인파워 과시’ 슬로건이 쑥스럽다.
오는 12일 한인의 세과시를 위해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마련된다. 올림피아 주청사에서 펼쳐지는 제1회 ‘한인의 날’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많은 주와 도시들이 ‘한인의 날’을 다투어 선포했지만 모두 1회성 결의안이었다. 워싱턴 주의회는 전국에서 최초로 한인의 날을 법제화했다. 이날엔 기념식과 함께 각급학교가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 등을 소개하게 된다.
기념식이 워싱턴주의 정치1번지인 주청사에서 거행되는 것도 이색적이다. 주정부와 주의회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다. 이들에게 강력한 한인파워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면 역시 기념식장이 차고 넘쳐야 한다. 정치인들은 특히 사람 숫자에 약하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위해 조직된 범 한인사회 준비위원회가 인원동원에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고되고 바쁘더라도 이날은 교회와 사회단체가 마련하는 버스에 분승해 올림피아로 가자. 한인파워 과시는 우리 당대가 아닌 후손들이 가슴 펴고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을 일궈준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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