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회 3.1절 기념일을 맞이하여 피 흘리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에게 저 세상에서나마 평안하시기를 머리숙여 기원드리면서 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일제하에서의 항일 민족운동은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기미년 3.1독립 운동 때까지만 해도 유교적 정치이념이 항일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작용하였으나 3.1독립운동 이후로는 서구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1930년대 이후로는 비 합법적 지하운동이 항일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은 우리민족 스스로의 정신적 역량에서 우러나온 순수하고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은 평화주의를 기본으로 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된 항일 독립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무력으로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 진압 후에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발간을 허가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속임수의 하나였으나 두 신문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 섰으며 그래서 일제는 두 신문을 다섯차례나 정간처분을 함으로써 민족언론을 탄압하였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일제하, 국내 항일운동의 선도자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의하였던 것이다. 6.10만세운동 역시 학생들의 주도하에 1926년 6월 10일을 기해 일어났으며 또,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 사건’은 민족차별에 항의한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일시위 운동이었으니 전국의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와같이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민족은 자각하게 되었고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해야겠다는 의욕으로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쳤던 것이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9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3.1독립정신을 구현하게 되었고 3.1독립운동 이후 새롭게 전열을 갖춘 독립군은 마침내 상해 임시정부 산하에 조국을 되찾기 위한 통합된 ‘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애국선열들이 일제의 총칼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그 희생이 너무나 크고 애통하지만 이러한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민족을 각성시켜 하나로 뭉치게 했고 나아가서는 아세아인들까지 자각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3.1독립운동은 우리민족의 무한한 영광이요,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토대로 해서 순수하고 충정어린 3.1독립운동 정신으로 뭉쳐서 10년만에 되찾은 대한민국에 성장동력(成長動力)에 불을 붙여서 하루속히 정체(停滯)를 극복한다면 대한민국은 또다시 새로운 국운상승기(國運上昇期)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애도하며 명복을 비는 바이다.
2008년 2월 28일
대한민국 광복회 회원 서해룡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