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없는 시애틀
지난 한 주간은 마음이 허전하고 입맛도 몹시 썼다. 시애틀의 역사를 장장 146년이나 기록해온 신문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스스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옛날 한국에서 겪은 신문폐간의 아픈 기억과 함께 신문 비즈니스의 척박한 풍토에 새삼 압도됐다.
필자는 10년간 구독해온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젠서(P-I)의 사멸이 믿어지지 않는다. 남북전쟁 때인 1863년 창간된 서북미 최고(最古) 신문이다. 한국의 독립신문보다 33년, 동아·조선보다 37년 앞서 창간됐다. 돈줄이 짧은 것도 아니다. 미국유수의 언론재벌인 허스트그룹이 모회사다. 11만8,000부나 찍는 신문을 인수할 사람이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P-I만 망한 건 아니다. 덴버의 록키 마운틴 뉴스도 지난달 문을 닫았다. 시카고 트리뷴 등 4개 신문이 파산을 신청했고, 켄터키 포스트와 캐피털 타임스(위스콘신) 등 7~8개 일간지가 P-I처럼 인터넷 판으로 전환했다. 사이언스 모니터도 뒤따를 예정이다. 1990년 이후 폐간한 신문사가 전국적으로 200개에 이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시애틀의 유일한 일간지가 된 시애틀 타임스도 풍전등화다. 창간 후 한 세기 이상 경쟁해온 라이벌이 사라졌다고 좋아할 처지가 못 된다. 연방정부의 공동운영법(JOA)을 근거로 체결한 협약에 따라 P-I의 광고·배달·인쇄·독자관리 등 비즈니스 일체를 대행하며 챙겨온 수입이 경쟁지의 폐간으로 끊겼다. P-I처럼 든든한 모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타임스는 P-I보다 8만여부 많이 발행하지만 최근 몇년간 광고수입이 격감해 도산위기에 처했다. 이미 직원 400여명을 해고했다. 그래도 빚이 계속 불어나 부동산과 소규모 계열신문사들을 처분하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한 간부는 P-I가 먼저 폐간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타임스가 더 버틸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애틀이 머지않아 ‘로컬신문 없는 도시’라는 불명예를 안게 될 것으로 우려한다.
신문폐간의 아픔은 필자의 피에 스며있다고 할 수 있다. 조부(윤희중)가 이미 70여년전 신문폐간을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부가 CFO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현 중앙일보와 무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해 동아일보와 함께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약 1년 뒤 풀렸지만 그 사이 신문발행 허가기간이 만료됐고 지방토호로 ‘돈 줄’이었던 조부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어 자진폐간하고 말았다. 필자가 태어나기 6년 전 일이다. 노년의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던 여운형 사장, ‘신여성 기자’였던 노천명(시인) 등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을 보며 감회에 잠기곤 했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폐간도 있다. 한국일보의 자매지로 한국 최초의 경제전문지였던 서울경제신문(1960년 창간)이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일부 다른 신문들과 함께 강제종간 됐다. 당시 침통한 얼굴로 짐을 꾸려 나가던 입사동기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있다. 필자가 80년대 초 LA 본사에서 창간을 도운 한국일보 영문판도 10여년을 버틴 끝에 종간됐다. 광고가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를 교포로 만든 단초가 된 신문이었다. 주간지로 전환도 해보고 본국의 코리아타임스를 전재하기도 했지만 결국 단명했다.
요즘 같은 불황에 신문만 독야청청할 수는 없다. 신문 비즈니스는 원래 어렵다. 그렇긴 해도 40년 넘는 쟁이생활 끝에 은퇴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자고 나면 신문사들이 사라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다.
폐간한 P-I 건물엔 옥상의 대형 회전지구본 외에 또 다른 명물이 있다. 복도 벽에 새겨진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이다. 제퍼슨이 지금 세상에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할는지 궁금하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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