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고개, 보리고개
만우절이 가까워서인지 날씨도 속이려든다. 일주일 전에 춘분이 지났고 일주일 후면 청명한식이다. 그런데도 겨울은 눈치없는 손님처럼 떠날 생각을 않고 뭉그적댄다. 꽃비 아닌 눈비가 매일 지척거리고, 고지대엔 오늘 또 폭설이 쏟아진다는 예보다.
그러나 만우절 거짓말은 금세 들통난다. ‘지구한랭화’래야 어울릴 요즘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날씨도 오래 못 간다. 이미 수선화가 활짝 폈다. 목련도 봉오리를 틔웠다. 로도덴드론(rododendron)도 곧 화사한 자태를 드러낼 터이다. 머리 나쁜 필자가 외우기 쉽게 ‘오삼디삼(O3D3)’이라고 부르는 진달래처럼 생긴 워싱턴주 주꽃이다.
한국에선 수선화나 튤립이 아닌 진달래가 봄을 대표한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김동환), “바우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이서향),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김소월) 등 진달래를 찬미하는 시와 노래를 누구나 흥얼거린다.
필자는 봄에 태어나 역시 봄 태생인 아내와 봄에 결혼했다. 기자시험에 합격한 것도,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도 봄이었다. 심지어 이름에까지 ‘봄(春)’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래서 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만우절 거짓말이다. 필자는 봄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춘곤증이 싫고 꽃가루 알레르기도 싫다. 무엇보다도, 철없던 시절 진달래 핀 바우고개보다 더 넘기 어려웠던 보리고개에 얽힌 아픈 사연들이 아직도 가슴 속에 멍울져 있다.
40줄 아래의 독자들은 보리고개를 보리밭 언덕길로 오해할지 모른다.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라는 가곡(박화목 시, 윤용하 곡)처럼 낭만적인 고갯길이 아니다. 작년에 추수한 쌀은 바닥나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식량고비’를 일컫는다. 춘궁기(春窮期)라고도 했다.
필자가 자라난 시골의 보리고개도 무척 험했다. 고구마밥, 강냉이죽, 밀가루개떡은 고급음식이었다. 하루 한두끼를 거르거나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동네사람이 많았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봄철에 세상을 뜨는 노인과 어린애들이 유난히 많았다.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이나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는 농담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꼬마들도 끼니 때우는 일이 최대 급선무였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학생이 태반이었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방앗간 집 아들이었던 필자가 도시락 외에 간식으로 싸가는 누룽지를 놓고 급우들이 사생결단의 쟁탈전을 벌였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가출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전이나 서울로 떠난 후 행방불명된 친구들이 속출했다.
한민족이 숙명처럼 넘어온 질곡의 보리고개가 사라진 건 불과 30여년전이다. 요즘엔 농촌사람들도 보리가 익기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쌀이 남아돌아 걱정이다. 당뇨환자들이나 건강식으로 보리밥을 찾을 정도여서 보리 자체가 생존고개를 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보리고개를 이해 못한다. 특히 한인 2세들에게 보리고개 얘기를 하면 만우절 거짓말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이들은 냉장고 안에 당연히 음식이 있고, 밥이 없으면 햄버거를 사먹으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푸드뱅크에 가서 얻어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기를 쓰고 보리고개 얘기를 해줄 이유도 없다.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불과 한세대 전까지 해마다 우리를 옥죄어온 보리고개에 비하면 요즘 겪는 불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끼니를 걱정할 상황은 아니니까…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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