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노해는 그의 에세이집 ‘다른 길’에서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라고 썼다.
여기 76년을 함께 산 노부부가 있다. 외롭게자란 스물셋 청년은 처가에 들어가 죽도록 일만 했다. 열네 살 어린 소녀는 이 청년이 자신의 남편인 줄도 모르고, 그저 일꾼으로 알고 ‘아재, 아재’ 부르며 쫓아다녔다. 그렇게 덤덤하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곧 사랑이 됐고 그 사랑은 평생 이어졌다. 부부는 서로에게 첫사랑이자 두 번째 사랑이고, 세 번째, 네 번째사랑이자 끝사랑이 됐다.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밤 뒷간 가는 걸 무서워하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데려다 준다. 일을 보는 동안 노래를 불러달라는 할머니의 부탁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들어준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할아버지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겨준다.
깨끗한 옷을 지어 커플룩으로 입는다. 봄에는 꽃을 꺾어 서로의 귀에 꽂아 준다. 여름에는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친다. 가을에는 낙엽을 서로에게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하며 서로 이겼다고 만세를 부른다.
이들의 일상은 사소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작은 일을 한다. 76년을 밀어간다. 그래서 위대한 삶의 길이고 위대한 사랑이다.
이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감독 진모영)가 16일, 135만 관객을 넘어섰다. 독립영화사상 가장 빠른 흥행속도다. 이런 추세라면 ‘워낭소리’가 세운 독립영화 최다관객동원 기록(최종관객수 296만명)도 깨질 것으로 보인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최근 일일관객수는 10만명이 넘는다. 최종관객수가 1만명만 넘어도 성공으로 평가받는 독립영화 시장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성공은 놀랍다.
노인 두 명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특별한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영화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반응은 결국 이 부부의 판타지같지만 실재하는 사랑에 대한 온전한 지지다.
실재하기에 누군가의 판타지가 아닌 나의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어떤 기원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연출한 진모영(44) 감독을 만났다. 촬영 기간 1년3개월, 촬영시간 400시간. 무엇이 변했느냐고 대뜸 물었다. 그러자 진 감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시간이 쌓이는 게 중요하겠죠.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요. 오래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진 감독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로 관객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부부의 사랑’이다. 인간의 수명을 80세로 놓고, 결혼을 30세에 한다고 치면 부부가 함께 사는 세월이 자그마치 50년이다. 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좋은시간이다.
부부는 함께 하는 긴 시간만큼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그런데 만약 부부로 사는 그 시간이 불행하다면 어떨까. 그것은 어쩌면 최악의 삶은 아닐까.
노부부는 항상 손을 잡고 다닌다. 어느 한쪽이 걷다 지치면 괜찮으냐고 묻는다. 서로의 신발을 신기 좋게 돌려 놔준다. 사소한 부탁도 진심으로 들어주고 고맙다고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잠이 들고 함께 앉아 밥을 먹는다. 이들의 사랑은 거창하지 않다. 조병만·강계열 부부가 보여주는 것은 그저 작은 배려다. 작은 것을 쉽게 여기지 않고, 쉬지 않고 쌓아가는 방식의 사랑이다. 진모영 감독은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나이는 98세다. 영화의 진행과 함께 그의 건강은 악화한다. 할머니는 점점 쇠약해져 가는 할아버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남편은 마침내 저세상으로 간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첫 시퀀스는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진모영 감독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부부는 오랜 시간 계속 찾아온 진감독을 막내아들처럼 대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진 감독에게도 충격이었다. 그 죽음이 생활인 진모영에게는 충격일 수 있지만, 창작자 진모영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다. 죽음보다 극적인 사건은 없다. 게다가 부부는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지 않았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죽음 자체를 다루기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는 데 더 공을 들인다. 이 부부는 열두명의 자식을 낳았다. 여섯은 죽었다. 가난하고 못먹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할머니는 읍내 시장에 나간다. 숨이 차 걷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할아버지는 기어코 할머니를 따라 나간다. 부부는 여자아이 내복 5장과 남자아이 내복 1장을 사 집에 돌아온다.
할머니는 죽은 자식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살았을 적에 내복을 못 입힌 게 평생 마음에 걸린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저 세상 가서 우리 애들 만나면 꼭 내복 입혀주시라.""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부의 모습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하셨겠죠. 할아버지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할머니도 변하셨어요. 남편의 죽음이 슬픈 건 어쩔수 없지만, 그 슬픔을 뛰어넘은 행동이었어요. 내복 장면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고 봐요. 두사람의 사랑이 다른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죠."
진모영 감독은 이 영화를 사, 오십 대 부부들이 보기를 바랐다. 나이 든 부모가 있고 그들도 남편, 아내와 함께 나이가 먹어가고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러온 관객 중에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커플들이 많다는 점이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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