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하는 척하면서"(라이토)
“방어하고 있지"(엘)
“나도 알아"(라이토)
“훤히 보여"(엘)
“그 마음. 따라와, 끝까지. 불타올라. 하나의 불길이 되자."(라이토·엘)
사람의 이름을 적어 살인할 수 있는 `데스노트’로 악인들을 처단하는 천재고교생 `야가미 라이토’, 그에 맞서는 명탐정 `엘(L)’이 넘버 `놈의 마음속으로’를 주고받고 함께 부르며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한다.
15일 저녁 일본 도쿄 닛세이극장에서 본 `데스노트’는 2막 도오대학교 테니스코트 장면부터 본격적으로 탄력이 붙었다. 도오대학교에 공동 수석으로 입학한 두 사람은 테니스 채로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서로를 탐색하는 순간이다. 극이 시작된 지 40분이 지나서야 엘이 처음 등장하는 등 1막의 다소 밋밋함을 상쇄한다.
라이토와 엘의 팽팽한 싸움이 나와야 `데스노트’ 답다. 그런데 이날 라이토 역의 우라이 겐지와 엘 역의 고이케 텟페이는 큰 파괴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만큼 연기력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우라이 겐지는 정의감에 불타다 광기로 사람을 죽이는 라이토를 포착한다. 구부정한 태도에 큰 눈을 가만히 뜨고 있는 고이케 텟페이는 모습 자체가 엘이다.
문제는 가창력이다.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로 한국에 마니아층을 구축 중인 미국 출신의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신작, 이번이 세계 초연이다. 2003년부터 슈에이샤 `주간소년 점프’에 연재된 만화 `데스노트’(원작 오바 츠구미·작화 오바타 다케시)를 원작(국내외에서 누계발행 부수 3000만부)으로 일본 굴지의 엔터테인먼트회사 호리프로(Horipro Inc.)와 손잡았다.
우라이 겐지와 고이켄 텟페이를 비롯해 이날 배우들은 전체적으로 와일드혼의 드라마틱한 멜로디를 잘 살려내지 못했다. 킬링 넘버가 없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테마 음악 격인 `정의는 어디에’를 비롯해 곳곳에 와일드혼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그간 와일드혼 음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 대중음악의 한 분야인 엔카(演歌) 풍의 노래는 색달랐다.
그런데 일본 배우들의 가창은 와일드혼의 새 곡들의 호불호를 평가하기 힘들 정도로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공연전문잡지 씬플레이빌의 김아형 수석에디터는 “일본어 어감이 와일드혼의 곡 자체에 잘 붙지 않는 것 같다"고 짚었다.
이에 따라 한국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6월20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라이선스로 한국 초연하는 `데스노트’의 라이토와 엘을 홍광호와 그룹 `JYJ’ 멤버 김준수가 연기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창력으로 내로라하는 이들로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발군이다.
한류그룹 `JYJ’와 설경구·최민식·이정재 등 스타 배우들을 매니지먼트하는 씨제스엔터테인먼트의 공연제작 계열사 씨제스컬쳐의 첫 제작 뮤지컬인데, 이 회사의 대표인 백창주 프로듀서는 “남자 두 명이 동시에 이끄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광호와 김준수 캐스팅은 최적의 조합이다. 고급스러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일품인 홍광호는 방어하는 라이토, 가슴을 찌르는 쇳소리가 최강인 김준수는 공격하는 엘 역에 안성맞춤이다. 업계는 두 사람이 한 무대에 동시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게다가 약 한 달 반의 공연 기간 원캐스트로 나선다.
홍광호와 김준수의 조합 외 또 다른 가창자들의 호흡도 눈길을 끈다. 역시 현존 최고 뮤지컬디바로 손꼽히는 정선아와 박혜나다. 뮤지컬 `위키드’에서 글린다와 엘파바로 호흡을 맞췄던 두 사람은 `데스노트’에서 `아마네 미사’와 `야가미 렘’으로 다시 찰떡궁합의 호흡을 과시한다.
이번 `데스노트’에서 홍광호와 김준수가 물과 불의 조합이라면 정선아와 박혜나는 식물과 햇빛의 관계다. 정선아는 두 번째 데스노트 소유자이자 라이토의 여자친구인 `아마네 미사’, 박혜미는 미사를 지켜주는 사신 `야가미 렘’을 연기한다. 여기에 `킹키부츠’로 솔 가창력을 인정받은 강홍석이 라이토가 지닌 데스노트의 사신 `야가미 루크’로 극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뮤지컬은 권당 200쪽 안팎의 12권짜리 만화책을 무리 없이 옮겼다. 신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역임한 일본의 거장 구리야마 다미야가 연출했다. 그의 인장인 단순한 2층 무대가 오히려 담백함을 안긴다. 사신의 세계를 오가는 만화 원작을 어떻게 구현할까 궁금했는데 비움의 미학으로 대신한다. 다만 영리하지 못한 조명과 사신, 미사 등의 성의 없는 의상은 아쉬웠다.
사신 세계가 지루해 인간 세계에 `데스노트’ 게임을 시작하게 한 류크는 마지막에 말한다. “마치 신이 된 양 사람을 마구 죽이더니, 결국 마지막엔…, 너무나 인간답게 처참히 뒈지는군. 아무것도 안 남아, 아무 의미도 없고. 정말, 이런 게 제일 재미없단 말이야."
구리야마 다미야는 “이 `지루함’이라는 단어가 연재될 당시 21세기 초 일본 및 도쿄의 평온하고 공허한 기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극 초반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초침 소리가 이를 대변한다. 이 기분 나쁜 초침은 극에서 몇 번씩 되풀이되며 우울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뮤지컬 장르 자체가 상업적이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연극에 기반을 둔 구리야마 다미야의 대사가 다소 많은 연극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연출과 한국 뮤지컬배우들의 뛰어난 기량의 조합이 얼마만큼 시너지를 내느냐에 따라 한국에서 흥행의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와일드혼의 브랜드가 얼마만큼 먹힐 것인가도 관심사다. 뮤지컬평론가 겸 공연연출가 조용신 씨는 와일드혼의 `데스노트’ 참여에 대해“최근 10년간 왕성한 글로벌 프로젝트에 워낙 적극적인 작곡가 겸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기에 그 광폭 행보의 연장선으로 본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어떤 이보다 인지도가 높은 외국창작자"라고 밝혔다. 와일드혼과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호흡을 맞춘 이반 멘첼, 역시 그와 `몬테크리스토’에서 함께 한 잭 머피가 각본과 작사 작업에 참여했다.
닛세이극장은 1200석인데 이날 공연의 좌석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는 약 1800석이다. 씨제스컬쳐는 레플리카 공연이지만 한국 상황에 맞게 무대와 의상 등을 수정할 계획이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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