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뢰한’는 다양한 수식어로 불린다. 전도연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영화, 그리고 감독이 첫 번째 작품 이후 15년 만에 만든 영화. 오승욱(52) 감독이 만든 이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세계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보여주는 지겹게도 비슷한 뻔하고 철저하게 ‘만들어진’ 그렇고 그런 공간이 아니다. 오승욱의 세계에는 ‘인간’이 있다. 담대와 진취, 확신과 전진 같은 단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냥 인간’이 있다. ‘그냥 인간’이라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비열하고 치사하고,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또 그만큼 타인을 깔아뭉개는 ‘무뢰한’들이 있다. 영화 ‘무뢰한’이 흥미로운 건 ‘남자’ 정재곤(김남길)과 ‘여자’ 전도연(김혜경)의 알 듯 말 듯한 행동과 말들이 끝내 잘 이해가 되지 않다가도 어느새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알 것 같은 그들의 마음, 영화 속 정재곤과 김혜경이 아니라 현실의 나로서 정재곤과 김혜경을 봤기 때문에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오승욱의 하드보일드 세계 속 인간들은 ‘비열한 거리’가 아닌 ‘비열한 마음의 거리’를 걷는다. 또 다른 점은 그 비열한 마음의 거리를 걷는 인간조차도 비열하다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에게서 김혜경과 정재곤에 대해서 들었다.
- 곧 개봉이다. 소감이 어떤가.
“두렵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손해를 안 끼쳤으면 좋겠다. 떨린다."
- 잠도 못 자고 그러는가?
“(웃음)좀 그랬다. 요즘에는 인터뷰하느라 바쁘다 보니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편하게 자는 것 같지는 않다."
- 그도 그럴 것이 15년 만의 영화이지 않나. 칸에 초청받아 다녀온 것이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 조금은 되지 않았나.
“칸에 다녀온 게 보상이 아니다. 영화를 만든 게 보상이다.(웃음) 15년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다 그렇지 않나. 정말 잘 놀았다.(웃음)"
- 영화를 보니 참 쉽지 않은 이야기더라. ‘무뢰한’의 착점은.
“남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매혹되는 남자는 이상한 남자다. 자기 자신을 파멸로 끌고 들어가는 그런 남자다. 어떤 지점에서는 머리가 나빠 보이기도 하고, ‘왜 그런 삶을 살까’라는 부분에서. 어떤 지점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길만을 가고. 삶의 밑바닥에서 아등바등하는 그런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왜 그런 남자 캐릭터에 끌리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캐릭터들이 그렇다. 왜 그 이야기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성향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무뢰한’은 남자의 이야기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여자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던 그런 남자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런 남자를 주인공 삼아서 이야기를 풀기 위해서는, 여자가 나오지 않고서는 남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유일하게 죄의식을 가진 대상은 여성이라고 봤다. 이런 죄의식은 비단 ‘무뢰한’의 남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남자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과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여자 주인공을 만들어야 했다."
- 남자의 직업이 형사라는 건 이해가 된다. 남자로 시작한 이야기이니까. 그런데 여성 캐릭터는 뚝 떨어질 수 없지 않나. 당신의 말을 들어보면 함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인물 같다. 어떻게 창조된 것인가.
“취재를 하던 도중에 단란주점의 새끼 마담의 이야기를 들었다. 새끼 마담이 뭐냐면 큰 룸살롱이 있으면 각각의 방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자기 방으로 손님을 유치해야 하는, 자기 돈으로 술 사줘서 단골 만들고, 그렇게 번 돈으로 주식 투자해서 망하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시작했다."
- 그런 남자 정재곤과 그런 여자 김혜경,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만들어내는 이미지, 당신이 처음 떠올린 이미지는 뭔가.
“멀리서 보면, 남자와 여자가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점점 그들에게 다가서서 보면 여자가 남자를 칼로 찌른 상태다. 칼에 찔린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걸어오다가 칼을 뽑고, 씩 웃는다. 이거다."
- 질문을 조금 다르게 해보자. 그렇다면, 정재곤과 김혜경은 어떤 인간인가.
“규정할 수 없는 거다. 나와 전도연과 김남길이 만들어 가는 거다. 그걸 몇 단어로 ‘이건 이거다’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뼈를 만들어 놓았다면 두 사람은 핏줄을 만들고, 살을 붙이고, 비늘을 만들어 헤엄쳐 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를 단어 몇 개로 규정한다? 그건 폭력적이다. ‘넌 네가 만든 캐릭터도 설명을 똑바로 못하냐’라고 욕해도 좋다. 관객이 알아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규정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 두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물은 이유는 당신이 두 인물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다. 당신은 정재곤은 경멸하고, 김혜경은 연민하는 것 같다. 이게 정당한가.
“경멸이라…. 그렇게 한 단어로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런 건 있었다. 정재곤이 절대 영웅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재곤은 치사하고 야비한 인물이다.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건 결국 나 자신이기도 하다. 나도 그런 면이 있다. 언젠가 전도연이 나에게 그러더라. 정재곤이랑 나랑 비슷하다고. 나를 객관화해서 보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있었다.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만은 정말 경계했다."
- 그렇다면 김혜경은?
“연민이라기보다는 리스펙트에 가깝다. 김혜경은 술집 여자다. 밑바닥 인생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여자다. 그 고통 속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리스펙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을 모두 리스펙트해야 한다는 일반화는 아니다. 김혜경은 ‘무뢰한’에서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의 주변 사람은 김혜경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가 그런 고통을 견뎌 나가는 것은 리스펙트해야 하지 않나. 이 리스펙트는 ‘무뢰한’을 만드는 기본적인 태도다."
- 인간이 겪는 고통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 영화이니까 남성 여성이 구분된 것이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정재곤도, 김혜경도 모두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영화 촬영 전에 고사를 지내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인간의 고통을 잘 표현하게 해달라’고."
- 다음 작품도 비슷한 이야기일 것 같다.
“난 아마 ‘무뢰한’과 유사한 이야기를 계속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삶의 죄와 고통, 이런 것들…."
- 다음 작품은 더 깊어질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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