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예술품은 어떤 시기에 속하든 공존할 수 있다”
프리어의 자랑 중 하나가 이 공작의 방(Peacock Room)이다. 프리어를 만든 챨스 랭 프리어가 그의 도자기 컬렉션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던 이 방은, 그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1908년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공작의 방의 다른 벽면이다. 1923년에 대중에게 공개된 이 방은 아시아 미술과 휘슬러의 갤러리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가 이룬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순수 미술과 장식품, 회화와 도자기, 미국과 아시아가 만날 때 주는 예기치 못한 미를 프리어가 누렸듯이 우리도 즐길 수 있다. 전시돼 있는 한국 도자기들. 비색과 상감기법이 돋보이는 고려청자들이다. 공작의 방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도자기 컬렉션(위에서부터).
“미술관 처럼 정치적인 곳 없어”
코리아 갤러리들의 성장
필자가 20살에 유럽 배낭 여행 중 대영 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미술관의 규모에 압도되면서, 한국 미술을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아시아 관에는 1층 전면의 일본관과 2층 전면의 중국관 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우 발견한 것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참의 장식장 안에 있던 몇 점의 한국 도자기가 전부였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꼭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대영 박물관을 다시 가보면 일본 미술을 밀어내고 널찍하니 차지한 한국 미술관을 볼 수 있다. 한국이 문화 외교의 효과, 문화를 통한 국가 이미지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지 꽤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미술관들이 한국관(Korean Gallery)을 가지고 컬렉션을 하고 있다. 큐레이터나 학자들 또한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한국 미술 동호회까지 만들어 즐겨 감상을 하니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의 미, 고려청자의 비색
딱 두 달 전에 이 지면을 통해서 한국의 도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채 못한 부분이 있어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 본다. 프리어 갤러리는 훌륭한 한국 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많은 한국 도자기들이 일본인들이 다도에 쓰던 것을 컬렉션 한 것, 즉 일본인들의 취향에 따른 자기 선택의 아쉬움이 있지만, 자료에 의하면, 프리어 씨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 미술품은 10세기에서 20세기까지 500여점이 있고, 프리어 웹사이트를 통해 500점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많은 아이템이 도자기의 깨진 조각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 한국관에 전시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그 중 아주 일부의 수작들이다. 신라 시대의 옥이나 유리 세공품, 다양한 발전상을 볼 수 있는 고려청자, 불교 회화, 고려시대의 갑옷 등 청동 제품들, 조선시대 백자들이 보전되어 있다. 한국관 외에도 바로 옆의 ‘공작의 방’의 벽에 장식된 중에도 한국 도자기가 다수 있다.
특히 주목할 고려청자는 약 12-13세기를 전성기로 하는 약 300년간에 걸쳐 개발되고 발전된 도자기 기법이다. 처음에 소박하게 시작한 청자는 비색 청자시대를 거쳐서 하이라이트인 상감 청자를 탄생시켰다.
비색이란 푸른색과 초록색의 중간쯤 되는 색으로 옥색 또는 비취색에 가깝다. 비색은 또한 ‘우가청천’이라고 하여 비가 갠 뒤의 하늘빛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색은 청명한 가을 하늘빛 가운데 은은한 녹색의 비취빛이 감도는 색에 흡사한데, 중국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한국인만의 색채감각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인이 색채 감각이 뒤쳐져서 백색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하는데, 고려청자의 비색을 보면 그 세련됨과 아름다움에 압도될 것이다.
고려청자의 절정은 상감법인데, 이는 도자기를 건조시키기에 앞서서 무늬를 음각하거나 새감판으로 찍어내어 그 자국에 백토 또는 적토를 메워서 일단 초벌구이를 한 후 청자유를 발라 굽는 기법을 말한다. 구우면 색채가 변하여 백토는 순백, 적토는 흑색톤으로 바뀌어 나타나며 상감 청자에 쓰인 무늬는 학, 불사조, 국화, 당초, 석류 등 다양하게 응용되었다.
주지하는 대로, 일본인들은 대부분의 문물을 한국을 통해서 수입해 갔으므로, 도자기 또한 한국의 것을 기초로 발전시켰다. 일본의 박물관이나 미국의 미술관에서 조차 일부 한국 작품이 버젓이 일본산으로 둔갑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얼마 전에도 미국인 한국 미술 동호인이 미국 미술관에서 일본도로 되어 있는 조선도를 찾아내어 화제가 되었었다. 더욱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절실하다.
한국 미술, 한국 상품
그런 면에서 지난 5월 프리어 갤러리가 한국 영화제에 맞추어 한국의 날을 만들고 다양한 한국 문화를 소개한 일은 아주 고무적이다. 매년 좀 더 다양한 장르가 선보이면 좋겠다. 필자가 속상한 것은, 미술관 전체 컬렉션은 프리어 씨가 워낙 일본광이다 보니 그렇다 치지만, 뮤지엄 샵에조차 한국 상품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기념품으로 부채나 다도 세트 하나쯤 있을 법 한데 말이다.
필자는 그간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 서울대학교 팀이 와서 기증한 한국 미술 책 외에 장재옥 선생님의 요리책 시리즈를 책꽂이에 진열 판매할 수 있었고, 한국 미술을 엿볼 수 있는 상품 진열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도자기 작가들이 만든 소품이나 금속 공예품, 한국을 소개하는 상품들이 있다면 정공법은 아니더라도 관람객들에게 한국을 더 가까운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필자는 뮤지엄 샵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미술관 컬렉션의 엑기스를 집대성해 놓은 광고판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술관처럼 정치적인 곳도 없다. 처음 미술관의 역사가 식민지에서 훔쳐온 물건들을 자랑삼아 진열하며 국력을 자랑하던 것이었기 때문에도 그렇고, 미술관은 은근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념과 가치를 형성하게 교육하고 이끄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술관의 역할과 예술의 힘을 일찌감치 간파한 일본은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만국 박람회에 그토록 열과 성의를 다하며 자국의 문화를 알려왔던 것이다. 프리어 갤러리에서 현대 미술에도 관심을 갖고자 고용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의 전공이 미술과 상관없는 국제 정치학이란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순수해야 할 미술계에 정치력만큼 중요한 요소가 가장 예술과 멀어야 할 것 같은 돈이다. 그리고 돈과 미술의 껄끄러운 관계를 요약해 놓은 전시장이 바로 한국관 바로 옆에 위치한 ‘공작의 방’이다.
다시 재현한 공작의 방 - 시공을 초월하여 공존하다
프리어의 자랑 중 하나가 이 공작의 방(Peacock Room)이다. 프리어를 만든 챨스 랭 프리어가 그의 도자기 컬렉션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던 이 방은, 그가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1908년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 방은 원래는 영국의 선박계 부호인 프레데릭 레이랜드의 런던 자택을 위해 건축가 토마스 제킬이 디자인한 다이닝 룸이다. 그 후 1876년에 레이랜드가 다른 지역에 있는 그의 집으로 장기 여행을 하며 휘슬러에게 실내 장식을 주문하였다. 휘슬러는 푸른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강조하였고, ‘푸른색과 금색의 조화’라는 제목의 이 방은 안타깝게도 레이랜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호는 약속한 돈을 휘슬러에게 지불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휘슬러는 자신과 레이랜드를 상징하는 두개의 큰 공작이 싸우고 있는 ‘예술과 돈’이라는 벽화를 남겼다. 두 사람은 결별을 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레이랜드는 그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곧 이 방은 명작으로 간주되어 유명해졌다. 그가 죽고 난후 프리어가 이 방 전체를 사들여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그의 자택에 옮겨놓고 그의 도자기 컬렉션으로 채워 넣은 것이 현재의 모습니다.
이 방은 프리어의 미학에 대한 신념을 대변하고 있다. 즉 그는 ‘모든 예술품은 어떤 시기에 속하든지 같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23년에 대중에게 공개된 이 방은 아시아 미술과 휘슬러의 갤러리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가 이룬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순수 미술과 장식품, 회화와 도자기, 미국과 아시아가 만날 때 주는 예기치 못한 미를 프리어가 누렸듯이 우리도 즐길 수 있다.
새클러 갤러리-현대 미술 전시장으로
현재 진행되는 재미있는 전시는 ‘더러운 돈(Filthy Lucre)’이란 현대 설치작가 대렌 워터슨의 작품이다. 그는 휘슬러의 ‘공작의 방’을 빌려와 지나친 창조성으로 인해 망가진 폐허의 모습으로 공작의 방을 다시 변형하여 보여주고 있다. 다다이즘 이후 파괴도 새로운 창조로 인식되고 있는 작금에 워터슨은 예술과 돈, 예술가와 후견인의 긴장 관계, 그리고 19세기와 지금 작가들의 자유의 차이 등을 다양한 미디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작품을 가져다 자신의 재해석과 변형을 통해 재연출하는 패러디 또는 패스티시는 포스트 모던의 주요한 예술 태도 중의 하나이다.
새클러 갤러리는 급상승하는 아시아 현대 미술의 동향에 발맞추어 여러 현대 미술가들의 실험적인 설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쥬빙(Xu Bing)의 ‘달을 잡으려 하는 원숭이’라는 작품은, 새클러 갤러리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 된 위층부터 아래층까지 걸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의 ‘말장난’ 시리즈의 하나였고, 그는 항상 언어와 레터에 대한 고찰을 그의 작품의 주제로 삼아왔다. 마치 물에 비친 달을 따기 위해 원숭이들이 꼬리와 팔로 연결된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12개 나라의 원숭이를 가리키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현대 작가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데, 정치력 신장과 경제력의 호조와 무관하지 않다. 조만간 세계적인 한국 설치 작가들이 이 곳으로 몰려 올 산뜻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정실 박사
조지 워싱턴대 교수
미술사가
artrio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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