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교회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정신’입니다. 예수 정신이 살아있다면 가장 작은 교회라 해도 작지 않지만, 그것이 사라졌다면 아무리 큰 교회도 교회가 아입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보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제화된 신앙, 그릇된 권위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는 허물어져야 할 성전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려면 그의 자기 진술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가 일으키는 물결/무늬, 혹은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 회복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벗들은 사회의 유명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성전 체제의 대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들풀처럼 짓밟히고, 천대받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고, 또 그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예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점잖고 높으신 분들의 잔칫자리는 서열에 따라 배치되었고 지켜야 할 격식과 예절이 엄연했지만, 예수의 벗들이 벌인 잔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비난하며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11:19)한 것도 이해할만 합니다. 주님은 이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식탁에서는 누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껏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식탁에 동참한 이들은 모두 벗이었던 것입니다. 그 잔치를 통해 가혹한 로마 제국의 수탈과 종교적인 차별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던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은 우정과 나눔에 바탕을 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비록 가난할망정 함께 나눌 때 삶이 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숲 속의 빈 터 같은 사람이 된다면 더 좋겠지요. 저는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보세요”.
시인은 우리가 기대는 데가 참 많다면서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예수는 사람들이 지친 마음을 기댈 언덕이었고, 쉼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가면 우리도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고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세속적인 행복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맛보게 하고,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가는 길벗들을 만나 외로움을 벗어버릴 수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교회, 마치 뿌리 뽑힌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주는 교회 말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향에선 눈감고 뛰어도/자빠지거나 넘어질 땐/흙과 풀이 안아준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고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4년이라는 간단치 않은 역사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라고. 이 명령에 철저히 순복하여 스스로에게 복이 되고, 이웃들에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