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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마당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
SY PARK  (ID : taehyuni)
그리스도교와 이웃종교들



길희성(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1. 하느님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리스도교 단체인〈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주제로 불교를 논하는 일은 특이한 일일 것입니다. 또한 쉬운 일도 아닙니다. 저는 불교를 전공하긴 했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며 신학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불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내적 갈등과 신앙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사람이므로, 이번 강좌에서 저의 개인적 신학과 종교 이해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이 강좌는〈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사회?종교문화 운동의 하나로 전개하는 신학 프로그램이지 제가 참여하고 있는〈새길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린 마음으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왜 저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를 진지하게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오랜 종교생활과 신학 공부를 통해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학과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과 사상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성적으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갖는가에 따라 구원 받거나 지옥 간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사랑에서 하나 되고, 사랑으로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걸 동의한다면, 저의 신학 사상이 보수적 신앙이나 신학과 어긋난다 해도 여유를 가지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걸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물론 한국의 신학계, 종교계에서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하면 오명이 됩니다. 정확히 그 뜻도 모르면서 종교다원주의자를 핍박합니다.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정직하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하느님이므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과 관계 맺는 존재이시며,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모두 시간과 영원,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 인간과 하느님을 매개해주는 미디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세계의 성인과 성자들은 모두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인도해주는 안내자, 매개자, 혹은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중보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와 깊이, 넓이와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특별한 존재들이자, 하느님의 계시의 도구, 수단입니다. 즉 하느님이 그들을 통해 자기 존재, 얼굴을 알리시기 위해 특별히 선택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은 다양한 성자, 종교 미디어를 통해 인간과 교류해왔고, 인간 역시 그들을 통해 하느님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말씀을 드린다면, 저는 세계의 성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자라고 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그 안에 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인간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은 그것을 씨알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인간을 볼 때 하느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일그러진 인간성으로 인해 그것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긍정적으로 인간을 봐야 합니다. 우리도 중보자, 계시자가 될 수 있는 데 다만 탐욕과 죄 때문에 본성을 실현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로 가는 데 서로가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성인과 성자들은 인간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경지에까지 나아가는 분들입니다. 모든 인간이 본래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동양의 종교사상이 만날 수 있게 합니다.


2. 근대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 선교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이 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획일적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다양성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문화제국주의처럼 어느 한 문화가 지배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종교제국주의도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세계 15억 인구가 믿는 세계종교이지만, 아직도 세계 인구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하게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19세기 이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19세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한 채 수 천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서구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수세에 몰리며 몰락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실지(失地)한 그리스도교는 제국주의 식민세력을 등에 없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실지를 만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근대 그리스도교는 제국주의 세력의 첨병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한편으로는 노예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아시아에서는 식민 침탈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습니다. 병 주고 약 준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거의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19, 20세기의 그 엄청난 서구 군사력과 자본을 이용해 선교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성공한 곳은 한국,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뿐이다. 그나마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이 더 강합니다. 더욱이 아프리카 그리스도교는 독특한 아프리카 영성으로 토착화된 ‘아프리카적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처럼 서구의 낡은 그리스도교를 그대로 복제한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주체성 면에서 우리보다 낫습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필리핀과 우리나라만 그리스도교가 성공했습니다. 이것을 명예로 생각해야 할지 수치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이유는 그들에게는 불교나 유교, 도교와 이슬람처럼 깊은 철학과 사상을 가진 고등종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니미즘적이거나 샤머니즘적인 원시종교들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원시종교를 폄하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습니까? 이상하게도 불교, 유교, 도교 등 심오한 종교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가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고등종교 전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성공한 세계적으로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것도 한물간 지 오래인 서구 그리스도교를, 서구인들조차 외면한 그리스도교를 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실입니다.


3.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이유



이런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을 보면 신통하고 고맙다는 감탄의 표정이 아니라 약간 신기해하고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읽게 됩니다. “당신들은 문화적 주체성도 없는가?” 라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속으로 당혹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정말 우리는 문화적 주체성과 자존심도 없는 민족인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한국인을 특별히 사랑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배려로 그리스도교가 번창하게 되었고, 하느님은 한국인들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세상에 전하는 선교의 기지로 삼으신 거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적으로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가 번창한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면 해방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본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서구의 식민 통치를 받은 다른 나라들이 해방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압제자의 종교로 청산한 반면, 일본의 통치를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청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시기의 한국 사회는 종교적 진공 상태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 동안 불교는 지리멸렬한 산중불교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유교도 종교이긴 하지만 종교성이 약했습니다.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직접적 응답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조선 시대에 박해받지 않고 융성하여 고려나 통일신라시대처럼 주류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교 선교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 역시 토착종교를 무시하며 안하무인격으로 그리스도교를 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선교사들은 이런 종교적 진공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선교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6.25의 아픔, 7,8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같은 사회변동의 영향입니다. 불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도시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교회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은 모두 비신앙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적인 요인들도 들 수 있겠지만, 저는 하느님이 유독 한국인들만을 사랑해서 그리스도교를 번성하게 하셨다는 생각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불교는 해방 이후 60년대까지는 비구승-대처승 싸움을 비롯해서 많은 혼란을 겪다가 70년대 이후 안정을 되찾고 교세를 회복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의 최대 종교가 되어 그리스도교와 함께 종교계를 양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를 갖게 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물어보면 지성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대개 천주교 아니면 불교를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저질종교라는 생각이 지성인들 사이에는 팽배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를 믿을 사람은 이미 다 믿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웃음) 정말 이제부터는 빼앗기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참 희한한 종교입니다. 개종도 많이 시키지만 반면 탈종도 제일 많습니다. 한국의 종교 통계 자료들을 보면 자기 종교에서 탈종한 사람들 가운데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간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4.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



우리는 다종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살려면 이웃종교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한스 큉(Hans Kung)은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의 평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종교 간의 평화가 있다고 해서 세계의 평화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 간의 평화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입니다. 저는 그의 명제에 덧붙여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 서구와 이슬람권의 갈등은 종교와 평화의 관련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서구 특수성과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문화적, 종교적 갈등을 강조하는 입장은 매우 타당합니다. 탈냉전 시대 이후 민족, 문화, 종교간 갈등이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본격적인 종교 다원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종교관, 종교 의식이 이런 상황을 회피하고 무시하거나 과거의 단순한 배타적 신앙관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처지입니다.



종교 다원성을 인정하고, 모든 종교가 하느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가지면서도 어느 특정한 종교에 대한 신앙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문제 중하나입니다. 저는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화다원주의가 가능하듯 종교다원주의도 가능할까요? 특히 절대 진리를 주장하며 이웃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리스도교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가톨릭은 이 문제에 대해 개신교보다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개신교는 호전적, 배타적, 개종주의적 태도를 견지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역사, 신앙, 사상의 역사를 깊이 보면 세 번의 큰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리스-로마 세계로 진출하면서 그리스 철학을 접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교 교부와 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사상을 수용해 그리스도교 복음을 옷 입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만남의 산물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과의 직접적 만남의 체험이요 신앙고백의 언어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의 보편성과 만나지 못했다면 유대교의 한 분파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면서 위대한 사상, 철학, 신학이 있는 종교로 발전해 지중해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갈릴레이 이후 근대과학과의 만남입니다. 이제는 성서의 천당, 지상, 지하의 삼층적 세계관과 기적 이야기를 믿는 현대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믿지 않게 될 만큼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은 자연과학의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역사과학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교황청에서 갈릴레이의 이론이 옳았다고 인정한 게 1991년입니다. 참 빨리도 했습니다.(웃음) 그렇게 교회는 늦는 겁니다. 아직도 과학적인 세계관과의 만남과 충돌은 그리스도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도전입니다.



세 번째 도전은 이른바 동양의 고등종교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종교전통은 유일신 종교가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을 가진 불교, 힌두교, 유교, 도교입니다. 특히 동양의 종교는 과거의 그리스 철학처럼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구원의 종교입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아시아 사람들의 귀의를 받았던 종교들입니다. 그런 종교들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진리관과 배타적 구원관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는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 힉(John Hick)은 신학에 또 한 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중심의 세계관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폐기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동양 종교사상과의 만남이 신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심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중심적, 제국주의적 시각은 치명타를 입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입었습니다. 이 세 번째 도전은 첫째, 둘째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5. 한국 종교문화의 다원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종교다원 국가입니다. 주류 종교가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셋인 나라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외에 유교까지 생각하면 셋입니다. 장례식장을 가 보십시오. 가족들의 신앙도 제각각입니다. 스님이 와서 목탁 두드리며 독경하고 나면 목사님이 와서 찬송 드리는 진풍경이 우리의 종교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심각한 종교간 갈등이 없다는 게 신기한 일입니다. 물론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역대 대선 때 보면 대통령이 그리스도교인이냐 불자냐 하는 게 민감한 사안이 되고, 정치인들도 그것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이 자기 신자이길 바라는 미묘한 감정이 있습니다. 물론 드러난 갈등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최근 그리스도교 정당이 창당되었는데, 매우 위험한 현상입니다. 그래봤자 잘 안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행히 불교 정당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그리스도교 정당이 상당한 득표를 하게 되면 다음에는 불교 정당도 나올 게 명약관화합니다.



그래도 심각한 종교 갈등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헌법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유교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한국인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효심, 충성심 같은 유교적 심성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공통적 심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단일 언어, 단일 민족, 단일 역사를 공유해왔기 때문에 한 특정한 종교에 속하는 정체성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합니다. 한일 축구 전을 보십시오. 불교, 그리스도교 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단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게 됩니다. 배타성은 약자들의 자기보호본능이기도 하고, 자기의 흔들리는 아성을 지키려는 심리적인 기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끼리 똘똘 뭉치자는 마음이 애국심에도, 자기 종교를 사랑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집단주의는 무엇이든 인류 보편성과 평화의 적이라고 믿습니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그것이 죄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주의는 죄와 이기성을 은폐합니다. 집단 이기주의는 애국심을 가장하고, 신앙적 집단주의의 편견과 증오는 선을 가장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이렇게 배타적 신앙관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난처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만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할 때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또 내 사랑하는 식구들 중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건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원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로마서에 나오는 대로 양심에 따라 판단될 것이라 라고 하지만 깨끗한 답은 못됩니다.



도대체 과거 조상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게 그들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런데도 구원에서 배제 한다면 하느님은 매우 불공정한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면 왜 하느님은 그렇게 지각하셨는지,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수천 년 동안 사랑하지 않다가 이제야 사랑하기로 하신 건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선교사 등에 업혀 다니시는 분입니까? 그것도 제국주의를 틈타 야비한 방법으로 선교하셨다는 겁니까? 하느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보편적 의지를 가지신 분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의 모든 전통종교가 무가치하다면 우리 조상들은 전부 무가치한 삶을 살았단 말입니까? 지금도 우리 주위의 양심적이고 착한 이웃들이 단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멸망의 길을 간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증오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멸망을 외치는 종교며, good news, 복음이 아니라 인류의 절대 다수에게 화를 전하는 bad news의 종교가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6. 새로운 선교관과 구원관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는 잘못된 신학, 잘못된 선교관, 잘못된 구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대체 선교가 무엇입니까? 현대의 선교관은 이른바〈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교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다가 잡혀 죽은 분입니다. 그는 자기를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천국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전파하는 선교에서 예수가 하셨던 선교로 돌아가자는 것이 현대의 선교관입니다.



하느님은 선교사 등에 업혀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원주민의 삶 속에 계시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계시하고, 당신을 경험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종교가 없는 곳도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교회로 끌어들이는 선교에서 하느님나라를 현장화화고 사건화하고 어디에서든 실현하는 선교를 지향합니다. 이런 선교관에서는 이웃종교인들과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물음이 생겨납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도대체 구원이 무엇이기에 지옥 간다, 멸망한다고 잔혹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저는 구원은 하나 됨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치입니다. 개인이 이기적, 자기중심적 삶을 떠나 하느님과 하나 되고 동료 인간들과 하나 되어 소외와 단절, 외로움을 극복하고 더 큰 자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열리고 이웃에게 열린 넉넉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 됨이 구원입니다.



하나 됨에서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하나 됨의 인격적 표현이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됨으로써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삶입니다. 구원은 본래 인간의 인간다운 삶입니다. 영어의 구원 salvation은 라틴어 salus에서 왔습니다. 살루스는 ‘건강’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동료 인간과의 잘못된, 왜곡된 관계에서 잃은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통교하며 이웃,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이 인간다운 삶입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이 과연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일까요? 대다수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우리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일까요? 그런 하느님이 정말 예수가 믿고 전한 하느님일까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는 그 하느님이 맞을까요? 우린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교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인가, 아니 하느님이 과연 그리스도교 신자인가?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자만하고 하느님은 무조건 자기들 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철저히 비판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볼모잡힌 하느님을 해방시킨 이들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 정신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에 볼모잡힌 하느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주의자들에 사로잡힌 하느님, 성전과 율법에 갇힌 하느님을 해방시키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의 사역은 온갖 차별과 편견, 집단적 이기주의를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허물다 집단적 광기, 편견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 정결과 불결, 이웃과 원수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 됨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 하나 됨을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 완전한 사랑,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복음이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초기 시대에 백정 출신의 황일광(1756~1801)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반 신도의 방 안에 들어가 함께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격해서, “내게는 천당이 둘이 있는 데, 하나는 지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내세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양반과 백정 출신의 담이 허물어지는 역사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그게 없어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의 정신을 제대로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주인의 차별이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저는 만약 바울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산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도 불교인도 없다.”고 말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런 예수를 배반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하나 됨을 실천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선포한 그리스도교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도그마를 만들고 그리스도교라는 울타리를 치고 하느님의 구원을 전매특허라도 받은 듯 독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는 좋지만 그리스도교는 싫다고 합니다. 예수는 열린 분이지만 그리스도교는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오신다면 아마도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의 기득권과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교회의 담과 그리스도교의 편견을 부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그리스도교의 울타리에서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존재 이유는 자기 울타리를 치고 영역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역설적으로 무차별적 사랑으로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고 삶입니다.



언젠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저는 그리스도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죽어야 예수가 살고 나라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독점하고 예수의 이름을 팔아 교회라는 아성을 쌓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 게 진정한 그리스도교입니다. 빛은 지배하지 않고 비추고 감쌉니다. 밝고 따뜻합니다. 소금도 자신을 잃고 스며들어 음식을 맛나게 합니다. 인생을 살맛나게 합니다.


7. 종교다원성을 바라보는 네 가지 입장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우리는 종교 다원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가?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네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것만 옳다는 배타주의(exclusivism)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과거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교리 입장입니다.



둘째는 가톨릭에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진일보한 입장으로 이른바 포괄주의(inclusivism)입니다.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기초를 만든 칼 라너는 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밖에서 진실 되고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모를 뿐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이해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적, 보편적 진리로서의 로고스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도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건 다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배타주의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들은 아마 No, thank you!라고 그럴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더러 ‘익명의 불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그건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횡포입니다. 그냥 우리끼리만 그렇게 생각하자는 건 좀 인정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는 건 결국 예수를 알고 교회 오는 게 좋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마지막 완성은 그리스도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지고 세계인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한 영적 힘을 가진 종교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그 종교들이 모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해 주는 매개체라고 봅니다. 이는 신 중심적(theocentric) 신앙입니다. 앞의 첫 번째가 교회 중심적, 둘째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면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하느님 중심적, 실재 중심적 신앙입니다.



넷째는, 해답 아닌 해답으로서 세속주의와 회의주의입니다. 종교는 골치 아프다, 생각이 다 달라서 믿을 게 하나도 없다고 하여 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려 대상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입장에도 의미가 있지만, 종교사를 공부한 저는 모든 종교가 다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종교가 죄악도 많이 행했지만, 각 종교 전통에는 우리가 모르는 깊은 영성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속주의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종교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고 매개체고 중개자고 계시이며 창구입니다. 종교는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은 절대적입니다. 흔히 등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우리는 정상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산정에 올라가 본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씩 위로 오르며 그곳에서 끝내 모두 만나게 될 거라는 가설입니다. 그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최첨단 이론입니다. 저는 이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저만 아니라 토인비, 간디 같은 이도 받아들인 입장입니다.



또한 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비록 이론적인 건 없어도 상식적으로 모든 종교가 다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같은 산을 오르고 있는지,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른 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하나고, 한분 하느님을 믿고, 궁극적 실재는 하나라고 믿습니다. 평생 종교를 공부하다 보니 비슷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같은 것을 달리 이야기했을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입증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종교는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체를 완전히 알 수 없으니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어느 종교도 독점하거나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종교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 종교를 한꺼번에 믿을 수는 없습니다. 종교 공통 언어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다원주의 신학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은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지금 봐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몇 십 년 전에 서구의 진보적 학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이론으로는 아니어도 동양인으로서 섭렵하고 전개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다원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알려진 하느님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매개자요 계시입니다. 하느님이 손에 잡힐 듯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신앙이 배타적일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분은 사랑의 하느님, 모든 장벽을 허물고 인류를 하나 되게 하신 하느님이므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선교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전한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도그마에 사로잡힌 예수가 아니라, 흙과 땀을 묻히고 돌아다니신 민중 예수가 전하신 하느님을 전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종교의 이야기, 부처, 공자, 노자, 무함마드의 이야기도 겸손히 경청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예수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지 점검하고, 그 이해를 심화시키고, 배울 점은 배우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그 중에 나는 불교를 가장 좋아하므로, 이번 강좌에서 불교가 우리 신앙에 어떤 도전을 주며, 우리의 하느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를 어떻게 심화시킬 수 있을지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2004.4.4)
2012-05-26 08: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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