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도는 똑같다. 다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도의 내용은 한마디로 성실함이니 예수님에게 성실한 도를 기독교라 하고 부처님께 향한 성실함을 불교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나 절에 다니면서도 정작 성실한 것에 소홀함으로써 우리는 탐욕과 악의와 게으름과 같은 온갖 잡된 마음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욕망의 늪에 빠질 수가 없고 악의를 품고 있을 수가 없는 법이다.
성실한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자기에 대한 태산과 같은 신뢰로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이 위축되어 모든 것을 의심스러워하거나 마음이 팽창되어 거만하게 까불지 않는 법이다.
이러한 성실함이 물론 거져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쌓아가는 바른 견해에 의해서 구축되는 것이니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어려움을 일상생활에서 이룰 수 있게 설정한 목표물이 나라사랑(충)과 가족사랑(효), 이웃사랑(우의)이다.
나라의 일이란 곧 정치로서 귀결된다. 나라가 크고 자원이 많다고 잘사는 것도 아니고 나라가 작고 자원이 빈약하다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평등과 법과 질서가 있는가, 즉 사회정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의 마음은 대동소이하다. 친구따라 장에 가는 그저 그런 것이다. 질서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질서를 지키게 되고 무법천지에서는 누구나 무법하게 되는 법이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는 말은 참 무질서한 말이다.
귀담아 들을 말은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사회정의가 있는 곳이 최고다. 작은 비는 우산으로 몸을 가릴 수가 있지만 큰 비는 우산으로 막지 못한다. 타민족의 압제가 있고 인종차별이 난무하고 테러가 백주에 횡행하는 곳에서 어찌 자기 일신을 편안하게 지킬 수 있겠는가.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과 나라라는 큰 틀을 깊이 인식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성실함을 가지고 사회와 나라의 일에 동참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우리의 학교나 가정교육의 가장 중심적인 테마는 시민교육과 정치교육의 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정치학습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민주주의나 인권같은 것이 정치학습없이 공짜로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유치하다. 신라의 원광법사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서 세속인이 지켜나가야할 제일 계율에 나라사랑을 주장하고 있다. 나라사랑을 계로써 지키고 나라사랑 소홀히하는 놈은 율로써 다스려라.(사군이충) 성실함의 극치가 계와 율이기 때문이다. 또 이 성실의 도를 일상생활에서 연습하기 위해 가족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가족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따뜻함과 정있음과 용서, 포용, 위로, 헌신등 한마디로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이 가정과 가족이라 할 것이다. 물론 과거에 충효라고 하면 수직적 관계로 일반통행적인 명령과 복종과 보호와 부양등이 강조되어 온 비합리적이고 고통스러운 면이 너무나 많았지만 이러한 점은 고치면 되는 것이다. 고치면 멀쩡한 것을 내 던지기부터 한 단 말인가.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관계로 펴고, 책임과 복종같은 무거움은 편함과 편의제공과 같은 가벼움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가정과 가족의 일부분이 되는 것은 세속인이 지켜야할 계이며 이를 소홀히 하는 자는 율로써 다스려야 하는 것이니 세속 오계의 두 번째가 된다.
다음은 정신적으로 나라와 사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믿음과 신뢰이니 모든 사람이 신의를 가지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가 선의를 가지게 된다.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저마다 의심과 악의를 가지고 살게되니 악의는 무겁고 어두운 마음으로 우리를 긴장시키고 초조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쌓이게 하므로 모든 나쁜 감정의 원조가 바로 이 악의라 할 것이다.
한가지 웃기는 일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과 신뢰가 지금 종교적 믿음만의 대명사로 둔갑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 않는 자를 불신자라고 하여 죄악시하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종교인구가 국민의 총인구 숫자보다 많다는 나라에서 믿음과 신뢰가 무너져서 서로 속이고 의심하는 사회가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다 성실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포기하고 ‘매달리는 믿음’을 선호한 까닭이다.
어쨋거나 친구나 이웃을 믿는 것은 우리가 계로써 지킬 바이며 믿음을 잃는 것을 율로써 다스려야 마땅한 것이니 세속 오계의 세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하여간 이천년이 넘도록 따라온 나라사랑(충)과 가족사랑(효)과 이웃사랑(신)이 한번 더 이 시대에 맞는 해석으로 있어줄 기회를 잃어버린채 용도폐기된 것은 아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용도폐기 되었다고 생각되어온 것들이 사실은 우리민중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저 붉은 악마의 응원 결집력이 그것이며 새마을운동, IMF 극복등 모든 민족대사에 나타난 그것이 충효와 우의로 다져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천년이 결쳐 기왕구축해온 것에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어쩔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