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노려 통신원>
웨스트체스트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크게 나자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았다. 일요일 아침 모임엘 가니 신문기사를 봤다고들 한다. “이 동네기사가 신문에 나니 참 반갑더라구요.” 이제 한인주류사회에서 웨스트체스터의 한인들에게도 눈길을 주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눈치였다.
오래 전부터 여기 살고 있는 한인들은 어쩌면 한인주류사회에서 왕따 당하면서 살고 있었다고도 할 수도 있겠다.
온갖 한인 언론에는 웨스트체스트에 대한 소식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왕따를 ‘차별화’차원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이곳의 한인들은 플러싱이나 뉴저지로 부터 멀다는 지역적 이유로 왠지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한 20년 전에는 뉴저지와 웨스트체스트를 구분 못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다가 뉴저지가 한인사회로 크게 자리 잡았는데도, 웨스트체스트는 아직도 열외에 선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요즈음도 어떤 한인은 커네티컷과 웨스트체스트를 혼동하기도 한다. 이제 매
일아침 아파트 문 앞까지 한국일보가 배달되어 오는 시절이 되었지만, 몇 년 전만해도 고국 소식과 뉴욕의 한인 사회 소식을 알고 싶어 신문을 구독하면, 며칠 만에 한꺼번에 여러 장이 오곤 했고, 이곳에 하나밖에 없던 한인식품점에서 파는 신문을 사러 일부러 차를 타고 가서 신문
한 장을 사오기도 했다.
웨스트체스터는 맨하탄 그랜드센트럴 까지 3개의 기차선이 있어서 웬만하면 3-40분 안에 뉴욕시내로 갈수 있는 무척 편리한 지역임에도 한인들이 많이 없어서, 한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불편한 점이 참 많았었다. 자장면도 먹고, 머리도 자르고 오는 길에는 한 달 먹을 장을 보곤 하던
‘플러싱나들이’는 그 옛날 아이들이 어릴 때 멀리 여행이나 가듯 큰 행사였다. 큰 아이는 안고 작은 아이 유모차에 태우고 젖병이랑 기저귀 챙긴 가방 어깨에 메고 신이 나서 건넜던 화잇스톤 다리를 다시 건너올 무렵이면 녹초가 되곤 했다.
최근에는 혹시 사우나라도 하고 싶어서 뉴저지엘 가지만, 나중에 조지 워싱톤 다리를 건너오면서 비싸게 풀었던 스트레스가 다시 쌓이기 일쑤이다. 이곳의 한인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몇 년 전에는 잠시 ‘웨스트체스터 상인번영회’란 단체가 생기기도 했었고, 최근 한국일보 업소록 전화번호부의 한인회 섹션에는 ‘웨스트체스터 한인회’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을 본다. 그만큼 이곳의 한인들도 한인으로서 한인사회에 참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세상은 발전되기 마련. 이제 미주한인들 사이에 그래도 ‘신문하면 한국일보’인 한국일보에서 이렇게 웨스트체스트를 주목해 준 것에 대해서, 통신원으로서가 아니라, 여기 멀리서 늘 한인사회를 그리워하면서 살던 웨스트체스트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흐뭇하다. 우리들이 대(大)자를 좋아해서 어디나 다 大 자를 붙이곤 하는데, 이제 웨스트체스터의 한인들까지도 다 포함해서 명실공이 大 뉴욕한인사회란 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통신원으로서 어깨에 부담을 살짝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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