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없는 감사절
추수감사절이 코앞에 닥쳤지만 매우 썰렁한 분위기다. 실직한 가장이 넘쳐나고 자동차 ‘빅3’(GM·포드·크라이슬러)까지 파산위기인 판국에 축제무드가 조성될 리 없다. 올해는 칠면조 고기는커녕 국물도 없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란다.
추수감사절부터 성탄절을 거쳐 신년초에 이르는 한 달 남짓한 기간이 언제부턴지 ‘축제시즌(Holiday Season)’으로 불린다. 크리스마스카드도 ‘홀리데이 카드’로 둔갑했다. 감사절 이튿날은 연말세일이 실제적으로 시작되는 ‘블랙 프라이데이(검은 금요일)’이다. 홀리데이 시즌은 먹고 마시는 망년회가 줄을 이어 ‘망령 시즌’이 되기 일쑤다.
추수감사절이 미국인들만의 축제는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을 비롯한 많은 민족이 추수를 끝내고 축제를 벌였다. 미국의 첫 감사절 주인공도 우리가 흔히 아는 플리머스의 청교도들이 아니다. 그보다 56년 앞선 1565년 9월 지금의 세인트 어거스틴(플로리다)에 도착한 스페인 이민 800여명이 감사미사를 올렸고, 2년 먼저인 1619년 12월엔 버지니아의 버클리에 이주한 영국인 38명이 무사항해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플리머스 청교도들의 ‘땡스기빙’이 추수감사절의 효시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과 이웃 인디언들에게 감사했기 때문이다. 원래 농사와 거리가 멀었던 이들은 도착 이듬해인 1621년 밀농사를 망쳐 몽땅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왐파노악 인디언부족의 스콴토가 옥수수 씨앗을 들고 찾아와 재배법을 가르쳐줬다. 스콴토는 영국에서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청교도와의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아사위기를 면한 청교도들은 스콴토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미리 준비하고 사용하신 특별한 기구”라고 칭송하고 왐파노악 부족 90여명을 정착촌으로 초청해 사흘간 함께 먹고 마시며 감사와 보은의 축제를 벌였다. 그것이 제1회 땡스기빙이었다.
그 후 400년이 지나면서 땡스기빙은 많이 변했다. 세속화, 상업화 됐을 뿐 아니라 정신도 왜곡됐다. 이미 22년 전 워싱턴주 교육당국은 “청교도가 왐파노악 부족을 초청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더 많은 청교도가 건너와 인디언에 수적으로 우세해질 때까지 잘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교재물을 교사들에게 배포했다. 작년 감사절 직전에도 시애틀교육구가 교사들에게 추수감사절의 교육내용을 재고하도록 권고해 논란이 일었었다.
땡스기빙이 상업화됐고, 의미도 왜곡됐고, 불황으로 분위기까지 썰렁하니 올해 감사절은 없는 걸로 하자는 말이 아니다. 본래의 뜻을 한번 되새겨보자는 얘기다. 인디언 원주민들에겐 감사절의 참뜻이 아직도 ‘나눔’이다. 해마다 감사절 시즌이 되면 조상 스콴토가 아사직전의 백인들에게 베푼 나눔의 정신을 발현해 불우이웃을 도우며 스스로 감사해한다.
감사는 배부르고 등 따스할 때보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 더 가치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의사 A. 크로닌은 불안, 좌절, 공포, 자신감 상실 등에 빠진 우울증 환자들에게 ‘감사요법’을 처방했다. 6개월간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땡큐’라고 말하도록 한 결과 거의 모든 환자가 반년 안에 크게 호전됐다고 밝혔다.
필자는 결혼식을 주례할 때 신랑신부에게 피차 감사하며 살라고 이른다. 일생의 여정을 반려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사랑하라는 말이 구차스럽다. 그런데, 중장년 부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은 수십번 했어도 서로 감사한다는 말을 하며 산다는 부부는 본적이 없다. 올해 감사절엔 이 것 하나라도 실천해봄직 하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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