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사람’
지난 1992년 선거 때 한 희떠운 사람이 부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이름이 ‘Absolutely Nobody’였다. ‘전적으로 별것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지사 직이 무용지물이라는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기 위해 적법하게 개명한 후 출마했다지만 당연히 낙방했다.
그 후 16년이 지나자 부지사 직이 아닌 주청사 건물이 ‘전적으로 별 것 아닌 것’이 됐다. 주청사의 대리석 현관에 연말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장식물이 놓여져 종교 각축장 노릇을 하더니 올해는 종교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까지 합세해 아수라장으로 전락했다.
시비의 발단은 크리스마스트리이다. 지난 2006년 한 유대인 랍비가 주청사의 성탄트리(시택공항 것도)는 특정 종교 편향이라며 항의하고 나섰다. 결국 ‘메노라’(유대교의 일곱 촛대 장식물)와 아기예수 탄생 모형물이 설치되더니, 급기야 올해엔 무신론자들의 ‘신은 없다’는 입간판이 끼어들어 소란을 빚었다. 엊그제는 캔자스의 한 보수교회가 “산타클로스는 당신을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의 입간판을 설치하게 해달라고 주지사에게 요청했다.
알고 보면 크리스마스트리가 본래적으로 기독교 전유물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탄절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라”는 구절이 없다. 많은 비 기독교인들이 집 안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반면 정작 일부 보수주의 교회들은 트리 장식이 비 성서적 우상숭배라며 철저히 배척한다. 1851년 미국에서 최초로 헨리 슈완 목사가 클리브랜드 교회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을 때도 신도들이 ‘이교주의(Paganism) 행위’라며 비난했었다.
성탄트리의 기원에도 정설이 없다. 대체로 고대 북유럽의 ‘동지축제’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사람들은 한겨울의 짧은 일조시간이 동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길어짐을 반기며 다양한 축제를 벌였다. 그 축제에 전나무 장식이 사용됐는데, 16세기 독일의 한 교회가 성탄절에 이를 처음 도입한 후 북유럽의 모든 교회가 뒤따랐고, 19세기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미국 등 전 세계에 파급되면서 보편적 연말장식물로 자리매김 하게 됐다.
오늘날 크리스마스트리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무소부재이다. 교회와 가정은 물론 백화점에도, 백악관에도, 도심 광장에도, 스페이스 니들 꼭대기에도 설치된다. 매년 서북미지역의 특산물인 크리스마스트리(생나무)를 구입하는 수십만 명이 모두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주청사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도 기독교 단체 아닌 상인단체가 비용을 댔다.
그래선지, 크리스마스트리를 ‘명절트리(Holiday Tree)’로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많다. 보스턴 시는 2005년 시청 앞에 세운 크리스마스트리를 ‘명절트리’로 명명했다가 호된 여론의 질타를 받고 환원했다. 워싱턴DC 연방 의사당 앞마당의 크리스마스트리도 1990년대 이후 한동안 ‘명절트리’로 불리다가 2005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했다.
올해 주청사의 종교 장식물 시비는 트리 아닌 크리스마스 자체를 폄하하는 무신론자들의 입간판으로 더 격화됐다. 이들은 ‘크리스마스’ 대신 ‘동지’라는 단어를 썼고 “신도, 천당도 없으며 종교는 정신을 강퍅하게 하고 마음을 노예화하는 미신”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자들의 항의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며칠 전 문제의 입간판이 한나절동안 도난 됐다가 회수되자 당국이 경찰관을 고정 배치해 이를 지켜주는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다.
‘별 것 아닌 사람’은 16년 전의 부지사 후보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달러에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경구를 써넣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시비하는 사람들도 히떠워 보인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공평하게 옹호한답시고 쓰레기 장식물을 모두 허가해 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크리스 그레고어 주지사가 그렇다. 앞으로 4년이 걱정스럽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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