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의 존엄사
지난 한주간 한국을 뒤흔든 뉴스는 경제위기도, 정치판 싸움도, 북한의 미사일 위협도 아닌 ‘김수환 추기경 선종’이었다. 수십만 조문행렬이 엄동설한의 명동거리에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끝없이 이어졌다고 했다. 위인은 역시 사후에 진가가 더 드러나는 모양이다.
김 추기경이 군사정권에 항거했던 30~40년 전 필자는 줄곧 일선기자로 뛰었지만 추기경을 가까이서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청와대 접견실에서 거의 독대하다시피 했는데도 말이다. 추기경이 대통령보다 더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난다.
필자의 머리엔 십수년전 ‘열린 음악회’라는 TV 프로그램에 김 추기경이 나와서 당시 크게 유행했던 ‘애모’라는 노래를 부르던 소박한 모습이 떠오른다. 근엄하지도, 위선적이지도 않고 대중과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춘 그가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저런 성직자라면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교황장 장례미사까지 일주일 내내 김 추기경 기사로 도배질 한 본국신문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직업의식이 발동한 탓인지, 추기경의 또 다른 면에 매료됐다. 입원기일이 5개월이나 이어지자 그는 담당의사에게 “생명연장을 위한 어떤 조치도 원치 않는다. 인공호흡기 부착도 절대 안 된다”며 존엄사를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기 엿새 전인 10일 서울고등법원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 허용기준을 판시해 사법사상 새 이정표를 세웠다. 환자가 회생불능의 사망과정에 진입했고, 본인이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존엄사를 희망할 경우, 연명을 위해 계속해온 치료를 중단할 수 있되, 반드시 의사의 손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네 가지 가이드라인이 제시됐다. 이 판결에 따라 지난 1년간 식물인간 상태였던 76세 할머니가 인공호흡기를 제거 받고 숨을 거뒀다.
김 추기경의 존엄사 의지와 서울고법의 연명치료 중단 판시에 필자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불과 10여일 후인 3월5일부터 워싱턴주에서도 존엄사법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워싱턴 주민들은 작년 11월 존엄사 주민발의안(I-1000)을 의외로 쉽게 통과시켜 전국에서 오리건주에 이어 두 번째로 말기환자들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는 길을 터놨다.
이제 워싱턴주의 불치병환자들은 ▶6개월 미만 시한부 생명임을 두 명의 의사로부터 진단받고 ▶말로 두번, 글로 한번 존엄사를 요청하고 ▶증인 두 명(한 명은 상속인이 아니어야 함)을 세우면 의사로부터 치사량의 독극물을 처방 받아 목숨을 스스로 거둘 수 있다. 오리건주에선 비슷한 내용의 존엄사법에 따라 지난 10년간 341명이 생을 마감했다.
뇌사상태의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뗄 것인지 말 것인지, 시한부 말기암환자가 고통을 피하려고 자살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각자의 인생관, 도덕관, 신앙관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가톨릭교회 등 보수단체와 일부 의사들은 존엄사법이 살인방조법이라며 아직도 거세게 반대한다. 머지않아 첫 존엄사 케이스가 나오면 또한번 떠들썩할 게 뻔하다.
‘선종’은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임종한다’는 사자성어 ‘善生福終’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딴 천주교 용어이다. 김 추기경이 칭송받는 이유는 삶을 마감하는 과정에서 안구(각막)를 기증하고 소원대로 존엄사를 누린 그의 선종 자체 때문이 아니다. 87년 생애를 사랑과 감사로 일관하며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 편에만 서온 올곧은 그의 삶의 자세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헛소리다. 역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 추기경의 삶은 존엄사 없이도 크게 빛났을 터이다.
“얼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김 추기경이 불렀던 ‘애모’의 가사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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