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다는 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고교시절 한 급우가 환경미화를 위해 붓글씨로 써서 교실 벽에 붙여놨던 청마 유치환의 시 ‘旗빨(깃발)’이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 기억나지만 종이에 함께 그려져 있던 빨간 깃발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높다란 장대 끝에 매달려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었다.
깃발의 유래는 유치환의 시처럼 낭만적이지 못하다. 전쟁터에서 작전 지휘용으로 쓰인 것이 효시라니 낭만은커녕 으스스하다. 그 후 깃발은 선박간의 교신용으로, 종교행사의 장식용으로, 경기장의 응원용 등으로 쓰이다가 이윽고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로 승화됐다.
미국인들만큼 국기에 애착하는 국민도 드물 것 같다. 성조기는 다민족 합중국인 미국을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결속시켜주는 상징물이다. 전국의 관공서는 물론 대다수 상가건물과 일반 주택에도 365일 성조기가 게양된다. 심지어 달에까지도 성조기가 당당하게 꽂혀 있다. 전투엔 항상 성조기가 앞장서고 전몰장병의 관은 반드시 성조기로 덮여진다.
미국엔 국기의 날까지 있다. 바로 내일(6월14일)이다. 독립선언 이듬해인 1777년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의회가 성조기(Stars & Stripes)를 국기로 결정했고, 꼭 100년 뒤인 1877년, 연방의회가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성조기를 6월14일에 일제히 내걸도록 했다.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날을 국기의 날(Flag Day)로 선포했고, 1949년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6월14일을 연방 기념일로 공식 지정하는 ‘전국 국기의 날’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은 국기의 날로부터 1주일간을 ‘전국 국기주간’으로 정하고 성조기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 및 존경 정신을 고취시킨다. 그래서 6월 중순부터 독립기념일(7월4일)까지 3주간 전국 방방곡곡에 자연스럽게 성조기가 물결을 이룬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수업에 앞서 성조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나라인 공화국과 이를 상징하는 나의 국기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선서문을 암송한다. 시민권을 취득하는 한인 등 이민자들도 귀화식에 반드시 참석해서 성조기를 손에 들고 이 선서문을 낭송해야 한다.
태극기의 4괘가 오락가락하는 한인들도 성조기의 구조는 훤히 꿰뚫는다. 시민권 심사관이 십중팔구 질문하기 때문이다. 성조기가 미국인들의 의식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처럼 큰데도 한국에선 반미 시위가 있을 때마다 성조기 소각이 정례 코스로 돼 있다.
현재의 성조기는 7개의 빨간 줄무늬와 6개의 하얀 줄무늬가 번갈아 가로지르고 왼쪽 상단에 50개의 하얀 별이 파란 바탕에 9줄로 정렬돼 있다. 13개 줄무늬는 독립당시 13개 주를, 50개의 별은 현재의 50개 주를 상징한다. 연방에 가입하는 주가 늘어남에 따라 별의 수가 27번 바뀌었다. 현재 것은 1960년 하와이주가 가입한 후 마지막으로 바뀐 것이다.
성조기 게양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빨리 올리고, 천천히 내린다. 다른 깃발보다 높이 게양돼야 한다. 야간에 게양할 때는 조명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폭이 땅에 닿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꼭 개어서 보관해야 한다. 낡은 성조기를 쓰레기통에 버려서는 안 되며 보이 스카웃에 의뢰해 소각하거나 땅에 묻도록 하고 그 의식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좋다.
지난 현충일 전몰장병 묘역에 숲을 이룬 성조기 사진을 보고 필자는 유치환의 ‘깃발’에 공감했다. 그러나 나흘 후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을 뒤덮은 노란색 깃발에는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았다. 깃발이 아니라 모자와 풍선임을 나중에 알았다.
한인들도 내일 성조기를 자택과 업소에 게양하도록 권하려던 말이 장황해졌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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