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슈닝 상병
환갑까지 사는 사람이 많아진 후 환갑까지 구천을 떠도는 원혼도 생겨나는 모양이다. 한국동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워싱턴주 출신 소년병의 유해가 6·25 발발 59주년을 엿새 앞두고 지난 주말에야 워싱턴DC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니 하는 말이다.
캐나다 접경 블레인의 고교중퇴생이었던 로버트 슈닝은 1949년 1월 자원입대했다. 이듬해 6·25가 터지자 한국에 파병된 그는 그해 11월말 혹한 속에 20만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기습한 악명 높은 ‘초신 퓨’(Chosin Few, 장진 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슈닝 외에도 워싱턴주 출신 장병 472명이 한국전에서 산화했다. 3년간 이어진 한국동란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미국장병이 총 16만9,365명에 이른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뀔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슈닝이 전사한 후 북한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소련이 이미 망했고 중국은 막강 자본주의 국가로 180도 탈바꿈한 마당에 유독 북한만 마르크스-레닌의 망령을 떠받든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론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김일성 일가의 독재권좌를 유지하는데 공산주의만큼 좋은 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1973년 여름 남북 적십자회담 취재기자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씨왕조’를 체험했다. 천장에 선풍기 달린 버스를 타고 판문점을 떠나 약 다섯 시간 후 도착한 평양 시가는 러시아워인데도 한산했다. 길목마다 건물마다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수령 만세’ 따위의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미제(美帝)의 각(脚)을 뜨자’는 구호와 함께 민간청년이 미국인을 총검으로 찌르는 끔찍한 그림의 대형 간판도 여러 번 목격했다.
북한은 남북회담을 벌이면서도 남침용 땅굴을 팠다. 박정희 대통령 살해임무를 띈 특공대가 청와대 문턱까지 다다랐다. 국제노선 민간여객기를 폭파해 수백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갔다. 지금도 북한은 6자협상을 담보로 미사일을 발사하며 핵실험을 강행한다. 최근 외신사진으로 본 평양 시가는 36년전 필자가 직접 목격한 것과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남한은 동란이후 너무 달라졌다. 현재의 비까번쩍한 서울 모습에서 59년 전의 전쟁폐허를 떠올릴 사람은 없다. 남북회담 때까지도 북한보다 못살았던 남한은 지금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올림픽을 이미 11년 전 개최했다. 세계 최고선진국인 미국에 사는 많은 한인들이 최첨단 한국제 디지털 TV를 보며 한국제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달라졌다. 6·25를 고려나 이조시대 전쟁으로 아는 아이들이 40% 이상이란다. 6·25의 북침설에 솔깃해 하는 청년들이 많단다.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 핵무기가 자기네 것이라며 북의 핵실험을 옹호하는 젊은이까지 있다니 할 말이 없다. ‘반미 종북(從北)’을 진보사상으로 착각하는 젊은이들이 용납 받을 만큼 한국사회는 달라졌다.
슈닝 상병은 59년간 ‘MIA(전쟁 실종자)’로 분류됐다가 9년 전 북한에서 발굴된 유해가 최근에야 DNA 검사로 그의 것임이 확인돼 원혼의 한을 풀었다. 지난 19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엄수된 슈닝의 안장식에는 그의 7남매 중 생존한 3명이 초청받았다. 팔순 전후의 노인이 된 이들은 “우리 생전에 바비(로버트의 애칭)가 돌아와 기쁘다”며 울먹였다.
아직도 유택 없이 구천을 헤매거나 이름까지 잃어버리고 공동묘역에 잠든 원혼이 많다. 그래선지 6·25는 흔히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그래도 지난 한 주간엔 올림피아와 포틀랜드의 참전용사 묘비에서 헌화식이 이어졌다. 6·25는 잊혀질 수 없는 전쟁이다.
슈닝의 원혼이 59년을 잃었지만 북한도 똑같은 시간을 잃었다. 북한 시계는 지금도 1950년 6월25일 아침 6시25일 듯하다. 그 후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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