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이 뭐길래
본보 발행 업소전화부엔 각종 한인단체가 100개 이상 등재돼 있다. 대개 왕성한 활동으로 이름값을 하지만, 이름만 거창할 뿐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단체도 있다.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평통) 시애틀협의회가 그런 예다. 한인사회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 79명을 포용한 기관이므로 활력이 넘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기력하다. 평통이 뭘 하는 기관인지 모르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는 한인들이 (필자를 포함해) 부지기수다.
평소 있는둥 마는둥한 그 평통이 2년에 한번씩 한인사회를 뒤흔들며 톱뉴스를 뿜어낸다. 전대미문의 참신한 통일정책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임기의 위원 인선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지고, 빠져야할 사람이 들어갔다는 식이다.
소위 ‘낙하산 인선’ 논란은 다른 지역 협의회에서도 다반사다. 총영사들이 2년마다 홍역을 치른다. 공정한 추천절차를 거쳐 후보위원 명단을 본국 평통 사무처에 통보한다지만 인선에 총영사의 개인적 친분이나 사적 감정이 개입됐다는 의혹과 비난이 꼭 따른다.
올해 시애틀 지역의 인선잡음은 예년보다 컸다. 원로 한분이 공식회의 석상에서 총영사를 향해 “당신이 한인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장본인”이라고 지탄했다. 이어 새 회장을 비롯한 일부 위원들의 ‘낙하산 인선’ 시비가 도마에 올랐다. 시애틀과 타코마의 현직 한인회장들이 서로 등을 돌렸고, 급기야 일부 위원들이 사퇴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평통은 시애틀 한인사회의 자생기관이 아니다. 본국정부가 거의 30년전 자기네 필요에 의해 만든 매머드 ‘들러리 기관’의 서북미 지부일 뿐이다. 평통은 본국과 해외에 무려 1만7,000여 위원을 두고 있다. 대통령이 의장이고 연간 166억원의 국가예산을 쓴다.
평통은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떠받든 통일주체국민회의(통주국회)의 실질적 후계이다. 박대통령 피살사건 와중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8월 통주국회 대의원들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군사정권의 안정적 기반 조성을 위해 통주국회보다 큰 들러리 기관을 만들고 민주, 평화, 통일 등 민족적 명제의 단어들을 나열해 이름을 붙였다. 평통의 존재이유는 당초부터 이름과 거리가 멀었었다.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들러리 기관이 필요 없는 민주정부가 5차례나 바뀌었는데도 평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평통위원은 본국정부가 해외동포에게 위촉하는 유일한 공식직함이다. 자연히 경쟁이 유발된다. 그럴수록 본국정부는 해외 동포사회를 휘어잡는 수단으로 평통을 더 애지중지하며 활용한다. 더구나 2012년 대선부터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돼 있어 해외지역 평통의 비중과 그 위원들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게 뻔하다.
‘기유차리(豈有此理)’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우째 이런 일이…’라는 YS(김영삼 대통령)의 유행어와 일맥상통한다. “복통의 원인은 뱃속의 찬 응어리 때문인데 사람들이 응어리는 그대로 놔두고 복통이 그치기만 바란다. 어째 이런 이치가 있을까?”라는 주자의 말이다. 평통을 그대로 놔두고 한인사회의 분열과 잡음이 그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백년하청이다.
이민1세들이 퇴장하고 있는 마당에 동포사회의 분열만 조장하는 평통 운영을 2세 중심으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본국정부로선 1세만큼 이용가치가 없겠지만 장차 동포사회를 이끌어갈 싹수 있는 2세들에게 뿌리의식과 모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평통 운영예산을 이들의 모국방문 프로그램에 전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평통위원들을 있는 그 대로 존경한다. 위원으로 선정되기에 충분한 해당분야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평통위원이 됐다고 더 존경하지는 않는다. ‘낙하산 인선’ 따위의 지엽적 문제보다 평통의 존재의의 자체에 회의를 갖는 위원들은 없는지 궁금하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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