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홀렸다
시애틀이 바야흐로 황금날씨를 구가하고 있다. 하건동습(夏乾冬濕)이라지만 올 여름은 유난히 ‘쾌청’ 일변도이다. 마치 LA 같다. 불경기인데도 도심은 물론 산도 바다도 인파로 붐빈다. 서북미 최대 축제인 시페어가 개막돼 볼거리, 먹거리도 풍성하다.
지난 독립기념일에 엉덩이가 들썩여 도저히 방안에 앉아 있을 수 없던 필자도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이튿날 있을 토요산행을 고려한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행선지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인디언 마을 니아 베이였다. 지난 10년간 워싱턴주 내의 웬만한 곳은 거의 섭렵했지만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니아 베이에는 가보지 못했다.
사실은, 니아 베이는 경유지였고 진짜 목적지는 그 외곽의 ‘케이프 플래터리(Cape Flattery)’였다. 인근에 수줍게 숨은 샤이-샤이(Shi-Shi) 비치도 보고 싶었다.
에드먼즈에서 아침 7시10분 발 페리를 탔다. 최근 보수공사를 끝낸 후드 커낼 다리를 건너 104번 Hwy를 따라 거의 2시간 후 포트 앤젤레스에 도착했다. 112번 Hwy로 옮겨 또 2시간가량 달렸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주변 풍광이 워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니아 베이는 마카 인디언의 땅이다. 몇년전 빗발치는 비난여론을 아랑곳 않고 작살로 회색고래를 사냥한 ‘악명 높은’ 원주민이다. 초대형 고래 뼈를 고스란히 매달아놓은 부족 박물관이 볼만하다. 케이프 플래터리는 타운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4마일 떨어져 있다.
실제 등반거리는 고작 반마일. 길이 좋아 등산화 차림이 겸연쩍었다. 해송 숲속의 트레일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절벽 아래로 펼쳐진 절경에 숨이 막힌다. 깎아지른 바위섬들, 그 위에서 지저귀는 바닷새들.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가 전망대 절벽에 뚫어놓은 어마어마한 동굴들. 그 속으로 알랑방귀를 뀌듯(flattery는 아첨이라는 뜻) 철석거리며 밀려드는 산더미 같은 파도. 코앞에 놓인 손바닥만한 태투시 섬. 그 위에서 졸고 서있는 무인등대…
케이프 플래터리는 가볼만한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 미 본토대륙의 서북쪽 최종단 지점으로 워싱턴주에서도 단 한곳뿐이다. 필자는 꼭 30년 전 미국연수를 마치고 귀국에 앞서 전국 일주 길에 미국 남쪽 종단지점인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를 찾아갔었다. 키 웨스트와 케이프 플래터리는 대각선으로 각각 미국 땅덩어리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샤이-샤이 비치는 남쪽으로 4마일 정도 더 떨어져 있다. 호벅 비치(Hobuck Beach) 사인판을 따라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곳의 2마일 트레일 역시 평지지만 플래터리와 달리 낭떠러지 아래 비치까지 내려갈 수 있다. 바다에서 솟은 바위섬들이 마치 병풍 같다. 워싱턴주의 절경은 모두 인디언 부족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필자는 이번 여행에서 보너스를 얻었다. 112번 해안도로의 꽤 긴 구간이‘한국전 기념도로’임을 알리는 두 사인판 앞에서 찍은 ‘증명사진’이다. 3주전 “6·25는 잊혀질 수 없다”는 칼럼을 제대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길에 이 구간을 달리던 중 갑자기 나타난 순찰차가 필자 차를 패스하더니 바로 앞의 SUV를 덮쳤다. 참전용사들의 영령이 필자를 도운 모양이다.
독자 여러분께 꼭 케이프 플래터리와 샤이-샤이 비치를 가보도록 권하지는 않는다. 알고 보면 워싱턴주엔 가볼 가치가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스페이스 니들, 알카이 비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스노퀄미 폭포, 레이니어 산(파라다이스) 정도로 만족하면 곤란하다.
시애틀의 여름은 짧다. 여름이 끝날 때쯤 경기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부지런히 나들이하며 활력을 기르자. 경비가 많이 들지도 않는다. 필자는 이번 여행에 배삯과 개스값, 커피값 등을 합쳐 60 달러 남짓 들었다. 점심은 김밥으로 때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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