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물을 4반세기 이상 먹은 한인이 서울에 가면 ‘미국촌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예전에 사람들 몸에 뱄던 꾀죄죄한 도시문화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확 달라졌다. 미국에 이민 왔을 때 받았던 문화충격을 거꾸로 서울에서 받게 된다.
두달전 서울을 방문한 필자가 그랬다. 자동차 천국인 LA에서 20여년을 살았지만 서울에서 전철을 타며 촌놈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시청앞을 가려면 몇 호선을 타고 어디서 내려 어느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지 난감했다. 서울 땅덩어리 자체가 몰라보게 커졌다. 시청역에서 내려 엉뚱한 출구를 오르락내리락, 들락달락하며 발품을 팔았다.
서울전철의 효시인 1호선(서울역-청량리역)은 필자가 미국연수 꿈을 꾸던 1974년 개통됐다. 개통일인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노린 재일동포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졌다. 미국에 올 때(1978년)까지 이 전철을 탄 적이 없는 필자의 머리엔 공사를 위해 아수라장처럼 파헤쳐졌던 종로거리만 떠오른다.
그 후 필자가 미국에서 30년간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 동안 서울 지하철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2~8호선이 서울 땅 속을 사통팔달하며 웬만한 곳은 다 지난다. 기존의 경부선, 경인선, 경원선 등과 연계돼 인천, 천안, 평택, 수원, 동두천, 의정부까지 갈 수 있다. 8호선까지 총길이가 약 550마일로 도쿄,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4위를 자랑한다.
어제(24일) 아침엔 강서구 개화동에서 강남구 논현동까지 25.5km(25개 역)을 잇는 9호선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됐다. 강남권에서 김포공항까지 30분, 인천공항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게 됐다. 4년 후엔 논현동에서 종합운동장까지 2단계 구간, 6년 후엔 다시 종합운동장에서 방이동까지 3단계 구간이 이어져 서울은 완벽한 지하철망을 구축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시애틀에선 바로 일주일전 경전철 1호선(링크)이 개통됐다. 다운타운에서 시택공항 턱밑(턱윌라)까지 14마일로 서울 지하철의 40분의 1에 불과하다. 전동차 두세개를 연결해 지상(고가) 궤도를 달린다. 우람한 서울 지하철에 비하면 장난감 같다.
그래도 시민들은 신바람 났다. 시애틀이 전국에서 전철을 운행하는 20번째 도시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이틀간 개통축하 무료시승 잔치에 9만명 이상 몰렸다. ‘시애틀 전철의 대부’로 통하는 그렉 니클스 시장 부부도 끼었다. 대부분의 시승객들은 이제야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며 “이 좋은 전철을 왜 이제야 만들었느냐”고 푸념했다.
지난 80년대 킹 카운티 의원시절부터 줄기차게 경전철 건설을 주창해온 니클스 시장은 “오늘 경전철을 처음 탄 어린이들이 장성하면 경전철 없는 시애틀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필자도 지금은 지하철 없는 서울을 상상할 수 없다.
시애틀 경전철도 확장될 예정이지만 서울 지하철에 비하면 거북이 걸음이다. 2016년이나 돼야 다운타운에서 캐피털 힐을 거쳐 워싱턴대학 허스키 구장까지 연장된다. 린우드, 오버레이크(벨뷰), 페더럴웨이에 경전철을 타고 가려면 2020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경전철이 후지다며 시애틀을 낙후도시로 폄하하는 서울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시애틀 교통난이 서울보다 덜 급박하다는 반증이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평양은 서울보다 1년 먼저 웅장한 ‘천리마’ 지하철 노선을 개통했지만 세계적 낙후도시이다.
뜻밖에도, 필자는 지난번 서울방문 때 융숭한 ‘지공님’ 대접을 받았다. ‘지하철 공짜 손님’의 약자이다. 시애틀 경전철도 시니어들에게 공짜탑승 특혜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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