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1회 퍼레이드 참가인원 1500여명
김재택 박사 도움으로 뉴욕시 허가 순조롭게 받아
해 거듭하며 규모커져 뉴욕시 150여 퍼레이드중 15위내 진입
제1회 코리안 퍼레이드
창설 공로자 김재택 교수
1970년대에 한인 커뮤니티가 팽창하면서 80년에 접어들어 뉴욕한인들의 성장된 힘을 미국사회에 과시하는 문화행사의 형태가 코리안 퍼레이드로 표출됐다.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뉴욕시장을 위시하여 한인사회에 기여한 정치인들을 그랜드 마샬로 초청한 가운데 뉴욕의 심장부 미드타운 브로드웨이를 누비는 행렬, 코리안 퍼레이드가 창설된지 올해로 30주년이 된다. 해를 거듭하면서 뉴욕 최대의 문화행사로 자리잡은 코리안 퍼레이드는 이제 뉴욕에서 펼쳐지는 연례 150여개의 퍼레이드 가운데 상위 15위 이내에 진입한 것으로 종합 평가받고 있다. 아일리쉬들의 유명한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퍼레이드, 폴랜드계의 퓰라스키 퍼레이드, 이탤리계의 컬럼버스 데이 퍼레이드, 푸어토리칸 퍼레이드등 행사규모나 참가인원등에서는 떨어지지만 뉴욕한인사회의 문화수준과 성장을 보여주는 주요 바로메터로 활용되기도 한다.
코리안 퍼레이드의 시초는 30여년전인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추석을 맞아 맨하탄 브로드웨이 32가 광장에서 펼쳐졌던 농악 퍼레이드에 기원한다. 79년 10월5일 허호영 무형문화재 송파 산대놀이 보전자를 비롯해 농악인 김치중, 고전무용가 이선옥, 전명숙, 연국인 최형인등 30명이 출연하여 장고, 소고, 대고, 깽과리, 징, 칭칭이등 민속악기를 연주하고 탈춤과 농악, 고
전무용을 흥겹게 연출했었다. 1시간여에 걸친 농악이 끝나고 공연진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32가에서 26가까지 행진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32가 광장에서 가면극 송파 산대놀이를 공연했다. 인근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들을 비롯해 지나가던 행인등 3백여명이 이를 지켜봤다.
행사가 끝나고 이같은 문화행사를 1회성에 그치지 말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중론이 대두됐고 주최측인 한국일보가 윤영제 업무국장의 주창을 받아들여 다음해부터 연례 퍼레이드로 벌이기로 결정하고 행사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선진 언론으로서 소수민족인 한인사회를 대변한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한 것이다. 퍼레이드 허가를 내기 위해 뉴욕시와 접촉을 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다. 우선 퍼레이드 해당지역에 대해 당일 교통통제를 해야하는데 경찰국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때 마침 뉴욕시립 사법행정대학원인 잔제이대 교수로 있던 김재택 박사의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김교수의 행정학 강의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 뉴욕시 경찰국 간부, 시청 고위직 인맥이 꽤 두터웠는데 그들이 김교수의 공적인 부탁을 손쉽게 들어주었던 것. 뉴욕시와의 교섭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이듬해인 1980년 코리안 퍼레이드가 뉴욕한인회 주최, 한국일보 주관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5애비뉴를 선호했으나 그곳은 타민족 퍼레이드가 많으니까 코리아 타운으로 하자고 해서 브로드웨이가 행진코스로 선택됐다.
이에따라 제1회 코리안 데이 퍼레이드는 ‘자랑스러운 배달민족’이라는주제로 1980년 10월18일 정오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브로드웨이 42가에서 23가 까지 차량통행이 통제된 가운데 뉴욕시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펼쳐졌다. 행진 참가인원은 1천5백명, 연도변의 한인관람 2만여, 전체관람객 6만여명으로 집계됐다. 꽃차 협찬은 20개로 한국무역협회, 현대그룹, 효성물산, 금호실업,
대한한공, 삼성물산, 금융단, 쌍용, 국제상사, 대우실업, 선경, 등 한국기업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김명자 다이아몬드, 대뉴욕지구 태권도협회, 면동식당, 마르백화점, 뉴삼족정, 뉴욕한인경제인협회, 뉴욕한국일보등이 참가했다. 당시 예산규모는 8만달러. 각 한국학교 재학생 어린이 4백여명, 뉴욕지구 한인고등학생연합회 2백명, 한인대학생 500여명등 한인사회 각계 지도급 인사등이 행진대열에 참가했으며 무형문화재 22호 송파산대놀이 보존자 허호영씨와 문하생들의 탈춤놀이를 비롯해 부채춤, 탈춤, 농악등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80년 미스 유니버스 손 웨덜리양이 우정출연, 대회를 빛냈다.
휴 케리 뉴욕주지사는 개천절인 10월3일을 기준으로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을 뉴욕주 한국의 날(The Korean Day of the State of New York)로 선포했고 데일리뉴스는 10월19일자에 농악과 부채춤등 사진과 함께 코리언 퍼레이드를 크게 보도했다. WABC-TV WNEW-TV등도 퍼레이드 모습과 한국문화, 역사를 소개했다. 한국의 KBS-TV도 위성중계를 통해 모국의 시청자들에게 뉴욕 한인들의 퍼레이드를 방영했다.
2회대회 부터는 그랜드 마샬 제도를 도입, 81년 10월3일 열린 이해 퍼레이드에는 ‘성장하는 한인회’라는 주제 아래 에드워드 카치 뉴욕시장과 로렌드 디마코 한미재단 고문이 김세진 뉴욕총영사와 함께 퍼레이드 선두에 섰다. 꽃차 협찬에 한인 업체와 단체들이 조금 늘어난 가운데 한국 기업들과 함께 모두 23대가 참여했다. 퍼레이드 행렬에는 40개 한인단체 3천여명이 손에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참가했다. 한미수교 1백주년이 되는 1982년 3회대회에는 8개 한국학교, 60개 교회등 150여 단체가 행진에 참가했고 연도에는 3만여명의 한인들을 비롯, 8만여 관람객들이 행렬에 환호를 보냈다. 4회 대회에는 거북선, 기상관측소인 첨성대가 선보이고 에드워드 카치 시장 외에 김세진 총영사, 자니윤등이 그랜드 마샬로 퍼레이드 선두를 이끌었다. 9회대회인 88년 부터 행진 참가 인원이 4천명 선으로 늘어나는 한편 91년에는 데이빗 딘킨스 뉴욕시장이 그랜드 마샬로 참가했고 93년 14회 대회부터는 5천명 이상이 행진에 참가하는 증가현상을 보였다.
또한 1998년 19회 퍼레이드에는 조지 패타키 뉴욕주지사와 알폰스 다마토 연방 상원의원, 박노수 뉴욕총영사등이 그랜드 마샬로 퍼레이드 선두에 섰다. 그때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거행하던 코리안 퍼레이드는 2001년 9.11사태를 맞아 행사를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3천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은데다 한인 희생자도 18명이나 되는 국가적인 비극을 맞아 퍼레이드 사상 처음으로 한해를 거르는 기록을 남겼다. 2002년 부터 다시 재개되었고 2004년 24회 퍼레이드에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찰스 슈머 연방 상원의원, 찰스 랭글 연방 하원의원, 문봉주 뉴욕총영사등이 그랜드 마샬로 선정되어 퍼레이드 선두그룹을 이루었다.
지난해 29회 퍼레이드는 아메리카 애비뉴(6애비뉴)선상에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찰스 랭글 하원의원, 잔리우 감사원장 후보, 크리스틴 퀸 뉴욕시의장, 최준희 에디슨 시장등 유력 정치인들이 그랜드 마샬로 참가, 신장된 한인사회의 정치력을 과시했다. 행렬에는 15개의 오색 꽃차와 6개의 마칭밴드, 흥겨운 농악대와 취타대에 맞춰 한인사회 130개 단체들이 행진에 참가, 2시간 넘게 행진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코리안 퍼레이드가 뉴욕한인사회의 가장 큰 문화행사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 주최권을 놓고 몇차례 갈등이 있었다. 80년대 초창기에는 동포언론사 전체가 참여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90년대에는 뉴욕한인회 단독 주최를 실시한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뉴욕한인회 주최, 한국일보 주관으로 환원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에드워드 카치 뉴욕시장(가운데)이 선두에 선 제2회 퍼레이드. 왼쪽은 당시
뉴욕총영사 김세진, 오른쪽은 한미재단 고문 로랜드 디마코.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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