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기자들 사이에 회자됐던 넌센스 퀴즈가 있다. 검사와 형사와 기자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누가 밥값을 내냐는 것이다. 정답은 세 사람 모두 아니다. 식당주인이다.
당시 사회비리를 자조한 뼈있는 농담이지만, 그때도 기자들끼리 회식하면 밥값은 늘 부장 몫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금과옥조처럼 통용돼온 ‘고수입, 고부담’ 원칙을 따른 것이다.
요즘 많은 한인사회 단체들도 이 원칙을 원용하는 듯하다. 회원들의 쌈짓돈 회비만으로는 단체운영이 어려우므로 자연히 돈푼깨나 있는 사람을 회장이나 이사장으로 내세운다.
일종의 자율적 사회규범인 이 ‘고수입 고부담’ 원칙이 워싱턴주에서 법적으로 의무화될 조짐이다. 원래 소득세가 없는 주이지만 벌이가 좋은 부유층에 한해 소득세를 부과하자는 내용의 주민발의안(I-1098)이 11월2일 선거에서 주민들의 직접투표로 결판나게 돼있다.
‘부자 세’로 불리는 이 신종세금은 신통하게도 영세민 아닌 갑부들이 제의했다. 빌 게이츠 1세(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자기돈 50만 달러를 들여 캠페인을 시작하자 몇몇 갑부들이 동조했고, 워싱턴주 교사노조와 서비스직종 노조 등 부자세 부과대상에서 확실하게 제외될 근로자들을 포용한 단체들이 지지성금 120여만 달러를 모아줬다.
I-1098의 골자는 연간 20만달러 이상(부부합산 40만달러 이상) 소득자들에게 5%, 50만달러 이상(부부합산 100만달러 이상) 소득자들엔 9%의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주민들의 재산세를 20% 줄이고 영업점유세(B&O)를 4,800달러까지 공제해주자는 것이다. 발의안 추진자들은 이를 통해 거둬들일 연간 10억달러의 세금을 주정부 적자재정으로 예산이 가장 많이 깎인 영세민 의료 프로그램과 주립대학 지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의한다.
이 발의안은 주동세력이 부자들이 듯 반대세력도 (당연히) 부자들이다. MS의 최고경영자로 수십억 달러 재산가인 스티브 발머와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 회장 등 워싱턴주의 간판 기업인들이 반대단체에 각각 10만달러를 기부했다. 특히 발머는 자기의 보스인 게이츠 부자가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I-1098에 결연히 반대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이들은 워싱턴주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세금신설 아닌 일자리 창출이라며 I-1098이 통과되면 신규고용이 위축돼 결과적으로 불황이 심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부자들부터 소득세를 내다가 점차 모든 근로자들에게 확대될 것이 뻔하다고 꼬집는다.
세금기피의 속내를 감춘 ‘눈감고 아웅’식 항변 같지만 논리적으로는 이들이 옳다. 민주국가는 본디 과세형평 원칙을 중요시한다. 워싱턴주 최대일간지인 시애틀타임스도 이 점을 들어 최근 I-1098 반대 사설을 게재했다. 실제로, 지난 1932년에도 차별적 소득세 도입을 위한 발의안이 70%의 압도적 찬성으로 주민투표를 통과했지만 이는 일률적 과세율을 규정한 워싱턴주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무효화됐다. 그 후 헌법 자체를 수정하려는 주민발의안이 지난 1973년을 비롯해 몇 차례 상정됐지만 번번이 부결됐다.
판매세가 없는 대신 소득세가 있는 이웃 오리건은 연 수입 25만달러 이상 부부들에게 부자세를 부과하는 주민발의안을 금년 초 통과시켰다. 뉴욕과 메릴랜드 등 일부 주도 부자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워싱턴주는 전국적으로 소득세가 없는 7개주 중 하나이다. 올가을 선거에서 부자세가 통과돼도 주 대법원에 의해 또 뒤집혀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부자들의 세금 기피증은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게이츠 부부 재단처럼 자선기관을 만들어 스스로 사회에 기여할 수는 없을까? 일부 억만장자들이 사후 재산의 사회환원을 공언하지만 세금 기피나 다를 바 없다. 죽을 때까지 돈을 움켜쥐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럴 바엔 우리 같은 서민들에겐 ‘고수입 고부담’ 원칙이 법제화되는 게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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