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갑헌 (맨체스터 대학 철학교수)
뜰 앞에 핀 모란이 터질 듯이 아름답더니 비 내린 하룻밤 사이에 다 시들어 버렸다. 비오는 이른 아침 침대 속에서 받은 전화는 한국에서 온 것 이었다. 새벽에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며, OO가 오늘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했다. 그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빠른 속도의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스쳐지나갔다.
여름에 한국에 가면 만나리라고, 한남동 언덕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그의 집에서 묵으리라고, 바로 옆에 있는 리움(Leeum) 박물관에 다시 들려 가야의 금동관을 다시 한 번 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초여름 아침 이슬처럼 이렇게 가버리다니… 사는 것이 참으로 허무하다는 느낌이 안개처럼 밀려왔다.“풀은 마르고 꽃은…”아, 이렇게 쉽게 져버리고 마는 것인가?
며칠을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 부인에게 한 줄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글 한 줄 쓸 수가 없었다. 서재에 멍하게 앉아있다 옆에 있는 오래된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이상하게도 그가 오래 전에 보낸 편지 하나가 먼저 눈에 띄었다. 어렵던 시절의 절절하던 이야기들이 다시 살아오는 듯 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대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찻잔에 뜬 마른 풀잎처럼 편지 속을 맴돌고 있었다.
“소위 민주화 운동한다고 가끔 불려가서 얻어 터지고 구류 살고, 구속의 위험 속에 전전긍긍 하며 나날을 지내고 있다.”, “김지하 형이 난(蘭)을 파는데, 그 곳에 혹시 살 사람이 있는지 좀 알아볼래.”
나는 김지하의 난을 하나도 팔지 못 했다. 한국에서 부쳐온 우편료도 안되는 값으로 난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역겨웠다. 그 친구로부터 소식도 끊어진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고은 (高銀)선생으로 부터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운가. 알겠어, 무시무시하게 외로울 거야. 캠브리지에 등록했다니 갑헌이 네가 여기서 떠돌 때의 막막함을 가지고는 상상도 안되는군. 나도 철부럭 철부럭 똥 잘 누고 그냥 잘 살아가네. OO란 놈은 땡초가 돼 가지고 가끔 오는데… 呑虛란 중과 어울리는 모양이야. …황석영이는 며칠전에 또 우리집에서 자고 뜨내기로 가버렸어. OO란 눔 벌써 그게 중 제스처를 잡느라고 편지도 안나보구려. 아아 언제 갑헌이와 또 아욱죽 시금치죽을 소주와 함께 마시겠나? 함께 사는 게 제일 좋은 건데… 자네 아들놈 이름은 내가 지을 테니 자네 아내에게 전화하게.”나는 이 편지가 다 젖도록 울었다.
한국에 남겨 놓고 온 아내가 그리웠다. 중이 되어 떠나버린 OO가 그리웠고, 한밤중 담넘어 쳐들어가 얻어먹던 아욱죽이 너무도 그리웠다.덧없는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몇 번 인가 바뀌더니 OO도 환속하여 다시 운동권의 지도자로 또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경영하는 사업체도 자리가 잘 잡혀 사는 것도 넉넉해 지고 민주화의 공헌도 인정을 받아 높은 공직에서 국가에 봉사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그가 한남동 집으로 이사한 그 해, 우리 둘은 앞마당에 앉아 지난 세월을 헤인 적이 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나 이제까지 친구로 지냈으니 평생을 나눈 친구의 정이 이 보다 더 깊을 수는 없을 것 이다.
“자네 아내가 소개했던 그 생물 선생 생각나지? 내가 감옥에 들락거리는 것을 몇 번 보더니, 하루는 긴 편지를 남기고 떠났더군. 때가 여름 장마철이라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먹고 살려고 구로동 시장에 차린 운동화 가게도 홍수로 다 떠내려가고…, 에이 그만 살자 하고 한강으로 갔지. 흙탕물이더군. 죽어도 깨끗한 물에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네.” 발길을 돌려 열심히 치열하게 이 세상을 살아온 OO였다.
평생을 佛子로 살아온 OO와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내가 죽어 다시 만날 곳은 어디일까. 生也 一片 浮雲 起, 死也 一片 浮雲 滅…이라더니, 그는 한 조각의 구름처럼 살다가 갔다. 그가 간지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이제야 겨우 정신이 드는 듯하다.어제 아내와 저녁 산보를 나갔다. 캄캄한 길을 별 말 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지나…”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소리없는 기도가 되어 범벅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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