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한인이민자들의 보금자리 ‘저지시티 터줏대감’
지난해 세븐 일레븐 개업식, 왼쪽부터 조용래, 저지시티 제레미아 힐리 시장, 아들 기현.
모범적인 이민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으로 정착하면서 이 나라 주류사회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또 한인사회 봉사에도 참여하는 그런 태도가 바람직하다. 이 3박자를 맞추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세 가지 몫을 적절히 소화하면서 미국이민 40년에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 있는 조용래는 초기이민 정착지로 한인들의 애환이 담긴 저지시티의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한때 1,000여명의 한인들이 밀집 거주하면서 한국식당이 4개나 있던 저지시티. 최초의 한인교회인 뉴저지제일교회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뉴저지한인회도 창설되는 등 이민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한인들이 하나둘 빠져나가 이제는 커뮤니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저지시티를 그는 오늘도 꿋꿋히 지키고 있다.
맨하탄 다운타운에서 홀랜드 터널을 빠져나와 뉴저지로 진입하는 아웃바운드의 저지시티 14가 6차선 거리는 하루 차량 통행량만 8만대에서 10만대에 이른다. 수많은 차량들이 뉴욕보다 평균 10~15센트 저렴한 휘발유를 이곳에서 주유하고 뉴저지 턴파이크, 루트 1-9, 북부 뉴저지로 향한다. 그 초입 3블럭 양쪽에 경쟁적으로 자리잡은 주유소만 9개. 그중 요지에 세븐 일레븐과 함께 펌프 4개를 갖춘 벌레로(Valero) 주유소가 조용래의 삶의 현장이다.
“규모가 컸던 저지시티 메디칼센터 주변에 나보다 2~3년전부터 정착한 한인 의사들과 간호사 가족들을 중심으로 저지시티의 한인 커뮤니티가 구성돼 있었죠. 윤석진씨가 오픈한 아리랑 그로서리를 비롯해 식당, 미장원, 비디오점 등 한인업소들이 제법 활기차게 영업을 했고 1975년 길건너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김상진씨 등이 뉴저지한인회를 이곳에서 창설하면서 저지시티는 뉴저지의 플러싱으로 불릴만큼 초기 이민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15분이면 패스 트레인으로 맨하탄이 연결되는 장점을 이용해 일자리를 찾던 이민자들이 브로드웨이 한인도매상가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떠오른 곳도 바로 저지시티였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메디칼센터의 이전, 범죄율 상승 등으로 인해 주민들이 차츰 빠져나가고 비즈니스에 성공한 사람들이 학군 좋은 버겐카운티 등으로 이주함에 따라 저지시티 한인 커뮤니티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저지시티시 전체의 면모는 90년대 허드슨강변 쪽의 뉴포트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고층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현대화되었고 2001년 9.11 사태가 발생하면서 맨하탄 트라이베카지역의 금융기관들이 안전한 강건너 저지시티로 대거 이주, 파이낸셜 센터까지 들어서면서 뉴저지 최대의 경제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조용래가 처음 이곳을 찾은 것은 1974년 12월 친구의 안내로 보다 좋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민초 1년6개월간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도요타 딜러에서 파트 스탁맨, 매캐닉을 하다가 자신보다 봉급을 3배나 더 받는 친구를 찾아왔던 것이 때마침 불어온 오일쇼크로 인해 친구마저 레이오프를 당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이곳 모빌주유소에 걸린 ‘매니저 구함’ 사인이었다. 세일즈맨-에어리얼 매니저-디스트릭트 매니저를 차례로 만나 인터뷰에 패스한 결과 이듬해 5월부터 봉급받는 매니저로 주유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3년을 사고없이 착실히 운영하다가 딜러십을 얻었다. 딜러십은 본인이 직접 종업원을 채용하고 운영하면서 오일회사로부터 기름을 사주는 일종의 프랜차이스 개념이다. 매니저 3년동안 고객들의 크레딧카드 도용, 종업원들의 돈 훔치는 방법 등을 익혔기 때문에 사업상 많은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미군병원 근무, 카투사, 미8군 시빌 엔지니어로서 소방관, 직업통역 등을 거치면서 영어에 숙달됐기 때문에 비즈니스상 인종편견 같은 것도 겪지 않았다.
2000년 모빌과 액손이 병합되고 다시 타스코를 거쳐 카니코 필립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좋은 조건으로 땅까지 매입하면서 완전 독립된 앤딜러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미전역에 정유공장 13개를 갖고 텍사스에 본거를 둔 벌레로를 선택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7년전 매입한 주유소 뒷편에 1,2층 4,000 스퀘어피트 규모의 편의점 세븐 일레븐 매장을 신축해 지난해 또다른 비즈니스도 시작했다.
현재 벌레로에 들리는 하루 주유 인구는 약 3,000명. 4대의 펌프맨이 항상 바쁘고 세븐 일레븐 1,200명을 합치면 4,000여명의 고객들이 여기를 거쳐간다. 그가 1년에 판매하는 개스 총량은 350만 갤런쯤 된다. 연 3밀리언 갤런이면 A급에 속하니까 당연히 상위권이고 그동안 프리미어 딜러 어워드(미 전역 50위 이내)도 두차례나 수상했다.
그는 뉴저지에 오면서 미국사회부터 인벌브하기 시작했다. 봉사단체인 유나이티트웨이와 연관을 맺으면서 65세 이상 한인들이 소셜 시큐리티를 받을 때 출생증명 대신 호적초본을 신속 번역해 주는 등 한국담당 봉사를 했고 로터리 클럽 멤버, 마틴루터킹 주니어 커미셔너도 하고 저지시티 인수위원도 지냈다. 80년대에는 뉴저지한인회 부회장, 뉴욕한인회 이사를 맡다가 92년 허드슨상인번영회장, 94년 뉴저지경제인총연합회장, 친목단체인 가락회 회장, 지난해에는 동포은행 BNB 이사장도 역임했다.
특히 허드슨상인번영회를 이끌면서 이사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저널스퀘어 일대 홈레스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옷가지를 나눠줬던 급식봉사와 경로잔치, 재니스위스키 카운티장을 움직여 거창하게 치렀던 한국의 날 행사, 한국회관에 200여 명이 참석했던 연말 파티는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충남 대덕군 계룡산 밑자락이 고향인 그는 부인 조민숙과의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아들 조기현은 비즈니스의 대를 물려받았고 첫딸 지연은 메릴린치에 다니다 가정주부가 됐다. 교사였던 둘째딸 수연은 요즘 변호사로 활약 중이다. 손자 손녀 6명 모두 영세를 받았다. 이제 70대 중반을 넘긴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익힌 기계체조 덕분으로 정신은 40대 초반, 신체는 50대 초반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은퇴를 준비 중이다. 한국서부터 미국 덕을 많이 보았고 미국땅에 뿌리를 내린 그인지라 이제는 무언가 이 땅에 환원해야 되겠다는 강한 집념을 갖고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자신이 피눈물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최소한 5대까지는 유지하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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