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인종떠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 대변
1월 21일(월)은 신년 첫 번째 연방공휴일인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이다. 미국 인권 운동의 한 획을 그은 킹 목사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1986년부터 1월 셋째주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여 17년째 지키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친숙한 이 공휴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간략히 킹 목사에 대해 알아보자.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출생하했다. 원래 이름은 마이클 루터 킹 2세였는데 아버지가 1934년, 중세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마틴 루터로 개명을 하면서 킹 목사의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킹 목사의 공적은 무엇보다 당시 억압 받고 있던 흑인과 비주류 소수민족들의 실상을 미국 사회에 알리고 이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혼신을 다한 점이다. 특히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방법을 미국 인권 운동에 접목을 시켰다. 그런데 킹목사는 일반인들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흑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지엽적인 운동가가 아니었다.
킹목사의 궁극적 목표는 기독교적 박애를 바탕으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인류애적 공헌으로 킹 목사는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킹 목사가 생전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상은 미국 유대인 협회 (American Jewish Committee)가 수여한 미국 자유 메달 (American Liberty Medallion)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보적으로 유명했던 교황 요한 13세의 1963년 친필 편지도 킹 목사가 남긴 몇 안되는 아끼는 유품 중 하나였다. 흑인, 유대인, 가톨릭의 장벽을 떠나 한 인간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을 대변한 킹 목사의 공헌에 대한 지각 있는 사회의 감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사회 분위기는 킹 목사의 이런 고귀한 정신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못했다. 쓰레기 청소원 데모를 돕기 위해 테네시 주 멤피스 시에 내려온 킹 목사가 1968년 4월 4일 저격범의 총탄에 사망을 하고 만다. 한 달 후 영국에서 잡힌 저격 용의자 제임스 얼 레이 (James Earl Ray)는 처음에는 킹 목사의 피부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 죽였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불과 두달도 지나지 않아 자신이 암살범이 아니라고 주장 하는 등 아직도 킹 목사의 암살에 대해서는 미궁의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불과 39세 젊은 나이에 목숨을 마감한 한 흑인 목사의 족적은 현대 미국 사회의 변화에 한 획을 긋는 큰 걸음이었다. 킹 목사가 존경 받는 이유는 당시 한풀이 정도로만 치부되던 흑인 인권운동을 미국 주류 담론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버스 승차 거부로 로사 파크 등 젊은 흑인을 규합하여 이들을 인권 운동가 (Freedom Fighter)로 변화 시켰고 스스로 살해당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하는 어떤 곳이든 최일선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성난 대중에게 1963년 워싱턴 시에서 발표한 ‘I Have a Dream’ 웅변은 비폭력 저항운동이 패자의 변명이 아니라 폭력 앞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항하는 새로운 수단임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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