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가정. 봉사활동,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요
▶ 11살때 미국 와 바이얼린 시작 이후 예술가로 승승장구
뉴요커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는 뉴욕필하모닉 부악장, 메네스 음대교수, 더블스탑 재단회장으로 자신의 일과 봉사활동을 동시에 잘 해내고 있는 미셸 김. 그는 아내, 엄마로서의 삶도 놓치지 않고 있다. 그의 ‘반짝반짝 아름다운’ 24시를 들어본다.
미셸 김의 하루는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돌아간다. 오전9시면 뉴저지 집에서 맨하탄 링컨센터로 달려와 오전10시부터 12시30분까지 연습을 한다. 그리고 점심시간이면 차를 몰고 뉴저지 집으로 달려간다. 두 아이의 먹거리를 챙겨주고 오후 5시30분이면 다시 맨하탄으로 달려온다. 리허설후 오후 7시 연주를 한다. 1주일에 화,목,금,토요일은 필하모닉 연습으로 하루에 두 번, 40~45분 거리를 왕복하는 그는 틈틈이 메네스 음대 수업도 하고 더블스탑 재단 일도 본다.
“아무리 바빠도 일요일은 되도록 스케줄을 안잡는다. 이 날은 가정의 날이다. 온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날이다.”
▲일가친척이 모이면 늘 노래해
미셸 김의 집안은 노래하는 가족이었다고 한다.
“집안 가족 중에 목사, 장로, 전도사, 성악가가 많았다. 7형제인 아버지 가족들이 모이면 기도는 짧게 하고 늘 찬양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음악이 익숙한 내게 성가대 지휘를 오래 해오신 아버지가 악기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버지 김정길은 서울대 작곡가 졸업후 KBS(직장오락회, 노래의메아리, 삼천만의합창) MC를 볼 정도로 멋쟁이였고 어머니 김경자 역시 가사과를 나와 첼로를 켜는 건대 메이퀸 출신이었다. 어린 딸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은 1984년 미국 이민을 왔다.서울 명일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에 캘리포니아로 와서 11살에 본격적으로 바이얼린을 시작한 그는 콜번공연예술학교와 남가주 대학(USC) 손톤음대, 대학원을 전액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먼저 이민 가 있던 이모가 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좋은 스승 로버트 리세트를 찾아서 바이얼린을 배우게 했다.”
노스리치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동네에서 바이얼린을 배우는 그룹에 들어갔는데 5명 중 미셸 김이 제일 못하니까 스승이 개인지도도 해주었다. 함께 배웠던 그 꼬마들이 지금은 전부 대가가 되었다.( 뉴욕필 악장 셰릴 스테이플, 시카고 심포니 악장 로버트 쳉, 솔리스트 릴라 조세프에츠 등)하루 6~7시간 연습하며 기초를 전부 다시 배우고 익힌 후 12살에 콩쿨에서 2등을 했다. 그후 콩쿨마다 휩쓸었고 클로스로드 하이스쿨 11학년때는 91년 대통령장학생으로 뽑혔다.
그후 미셸 김은 뉴햄프셔 뮤직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악장을 거쳐 LA필하모닉과 산타바바라 챔버 오케스트라 등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모교 강단에도 섰다. 1남1녀의 장녀인 미셸 김은 부모님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은 끝이 없다고 한다. “밴딩 머신에 깡통을 채우러 다니고 그로서리 마켓 캐셔를 하는 부모님, 나비스코 팩토리에서 카페테리아를 할 때 새벽 3시에 집을 나가 중노동을 하다가 오후 3~4시면 오셨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항상 봐왔다. 악착같이 공부했다.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고 콩쿨에 나가서 상금을 타왔다”
▲너, 떨리지 않니?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하고 자리를 잡은 미셸 김은 언제 우리 곁으로 왔을까.
"친구와 제자들이 많고 작은 오케스트라의 악장도 수시로 하며 캘리포니아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았다. 그러다 스승의 권유로 필하모닉 오디션을 보게되었다.“
그때가 2000년 12월, 단원이 아닌 필하모닉 부악장으로 오디션을 봤다.
“결혼식 3일전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막상 뉴욕에 오니까 4계절의 변화가 너무 좋고 마음에 든다. 애 하나 낳고 나니 힘들어서 친정부모님도 뉴욕으로 오시라고 했다.”
2001년 3월 뉴욕필하모닉에 입단하여 인연을 맺은 지도 12년째다.
“뉴욕온 지 1주후 악장이 휴가를 가고 혼자서 6개월간 악장일을 해야 했다. 너 떨리지 않니? 스스로 물어보고 안떨려 하고 답했다. 원래 하던 일이고 내일에 충실히 하는데 왜 떨려, 뭐가 문제냐 했다”
생전처음 뉴욕에서 전철과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당차게 일을 해냈다. 부악장은 80명이상 단원들을 두루 아울러서 악장을 도와야 하는데 모든 일을 씩씩하게 해낸 것은 상냥한 성격이 한 몫했다.그는 ‘미셸 김’ 하면 ‘자랑스런 코리안’으로 기억되기 바란다. 그래서 매사 소홀할 수가 없다. 아이를 돌보는 것조차 그렇다. 친정부모와 남편 최승혁(커스텀주얼리상 운영)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엄마가 해야 할 일도 놓칠 수가 없다. 현재 뉴저지에머슨에서 친정부모, 남편, 아들 윤제(9학년)와 딸(7학년) 다연이가 함께 산다.
▲꿈을 펼쳐주는 더블스탑 재단
한인사회에 드디어 악기가 없는 음악영재에게 악기를 선사, 꿈의 날개를 펼쳐주는 단체가 생겼다. 바로 미셸 김이 만든 더블스탑 재단(DoubleStop Foundation)이다.
“LA에 살 때 유명한 재단에서 바이얼린을 빌려 사용했는데 빌린 지 10년이 넘어 돌려줘야 했을 때 너무 아쉽고 한이 됐다. 그래서 악기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재단을 만들 결심을 은연 중 하게됐다.”
그는 2010년 11월 재단 설립을 했지만 이미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에머슨 초등학교에 현악기 7대를 기증하는 등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일해오고 있는 참이었다.
작년 12월 17일에는 뉴욕가정상담소 호돌이 방과후 학교에 바이어린 13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더블스톱 재단의 대표적인 후원자는 그레이시머시 파운데이션, 워너미트(김원호사장), 코리언 리(한국보험회사)이며 악기기증 및 대여는 뉴저지 메인 바이얼린사(배성욱,조성각 공동사장)가 도와주고 있다. 현재 더블스탑 재단은 2013년 악기지원 혜택을 받을 12~22세 음악영재 선발을 앞두고 2월22일까지 신청(자료웹사이트(www.doublestopfoundation.org)을 받고있다.
‘그동안 예술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 고맙고, 나의 음악을 듣고 박수친 것을 돌려주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보다’는 미셸 김, 그렇다고 이 길이 마냥 순조롭지는 않았다.”
“6개월간 바이얼린을 손에 잡지 않은 적이 있다. 완전히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한 바이얼리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이 나왔다. 내가 저렇게 될 수 있다면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집에 오자마자 다시 바이얼린 연습을 시작했다. 비로소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이후 그는 비올라, 지휘와 성악을 배우고 첼리스트, 피아니스트, 지휘자 성악가에게도 레슨을 받았고 오페라, 발레도 보러가기 시작했다. 예술은 이 모든 경험이 농축되어 나오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초가 얼마나 튼튼히, 세상 구경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음악적으로 성숙해진다. 여기에 연습이 합쳐지면 좋은 음악가가 된다.”고 강조한다. 악기 소리보다 연주자의 마음이 들려야 관객의 마음이 열려 소통을 이룬다는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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