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지난 주말에 내린 폭설로 아직도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다. 차고 앞에 세워둔 차들이 완전히 묻혀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린 눈이 또 바람에 휩쓸려 이층 창문까지 쌓여 있으니 눈을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리 저리 삽질을 하고 제설기를 가동해도 40인치나 쌓인 눈을 다 치우려면 며칠은 걸릴 듯 했다. 눈 치우는 사람을 불러도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몇 시간 눈을 치우다 지쳐서 들어와 버렸다. 내일 아침 다시 하지…
마음 단단히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운동에 체조까지 하고 씩씩하게 나가보니 어찌된 셈인지, 차를 세워둔 곳을 빼고는 드라이브 웨이의 그 많은 눈이 길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누가 이 많은 눈을 다 치웠지?” 놀라는 아내를 바라보며 “여보, 좋은 이웃 속에 사는 것도 큰 복 입니다. 보지 않았지만 뻔하지, 앞집 조지가 치웠겠지.”아껴두었던 와인 한 병과 치즈 한 상자를 들고 찾아 갔더니, 껄껄 한참 웃고는 별 말이 없었다. 좋은 이웃을 둔 복을 다시 한 번 누린 셈이다.
허리까지 쌓인 눈이 앞마당에 서 있는 늙은 매화나무를 거의 덮고 있다. 눈 속의 매화나무라… 이것이 바로 설중매(雪中梅)가 아닌가. 옛 선비들이 시로 쓰고 붓으로 그리던 사군자(四君子)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던 것이 매화였다. 정결한 삶과 변함없는 기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선비의 상징이었다.
지난 해 2월은 날씨가 비교적 온화한 편이어서 앞뜰의 매화나무에 꽃이 많이 피었었다. 그 위에 눈이 오고 추위가 닥쳐왔지만 봄에는 매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풍성하게 열렸다. 매실은 익기 전에 따야 그 효능이 있다고 한다. 6월 말쯤 이던가, 친구 한두 집과 같이 매실을 따고 있는데 장모님이 나오시더니, 꼭대기에 달린 좋은 매실은 따지 말라고 하셨다.
“아니 왜 좋은 것을…” “그래야 새도 와서 먹고 벌레들도 먹을 거 아니냐?”무의식의 뒤안으로 사라졌던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과수원을 하시던 부모님께서는 과일을 수확 할 때 꼭대기에 있는 과일 몇을 반드시 남기셨다. 밥을 남겨도 반드시 물에 말아서 남기셨다. “그래야 새도 먹고 다른 동물도 먹는 법이다.”
미국에 살면서 장님이 되어버린 눈이 다시 뜨이는 듯 했다. 새도 벌레도 더불어 같이 먹어야 하는 상생 (相生)의 원리를 잊고 산 것이 부끄러웠다. 좋은 이웃이 꼭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이면 더욱 좋겠지만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을 이웃 삼고 동산에 떠오른 달을 반기던 우리 선인들의 삶이 부러웠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 이웃과 친구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나누는 삶, 깊은 눈 속에 피는 매화처럼 화려하지 않으나 정결한 그런 삶을 잘 사는 삶이라 했으리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큰 눈으로 멈추어 섰다. 뜻하지 않은 휴가에 이제까지 살아온 앞과 뒤를 돌아보며 피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되어 다행이다. 쌓인 눈 위에 밤이 깊다. 구름 없는 밤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하다. “은한(銀漢)이 삼경 (三更)” 이라는 이조년(李兆年)의 시조는 이런 밤을 이르는 것이었을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