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선<수필가>
윤기 없는 민낯으로 온통 성을 내고 있는 날씨가 익숙하게 하든일도 멈추게 한다. 막 커피 한잔을 타서 툭 하고 묵직한 엉덩이를 의자에 맡기고 손에 잡히는 스마트폰을 열어 페이스 북에 들어가 보니 반갑게도 한국에 있는 친구가 겨울풍경 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검은색을 띈 기와가 선과 각을 이루고 소복이 쌓인 눈이 음양을 돋우어 흑백인지 칼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담백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겨울여행-‘태백의 정암사’라고 적고 있다. 친구들과 겨울여행! 이건 뭐야 ,그럼 나만 빼놓고...갑자기 휑하니 그리움이 몰려온다. 지금까지 지내온 날들이 한 두 해도 아니고 ,이런 소식 한두 번 접한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소심하게 투정기가 발동하는 걸까?
젊음을 무기로 자유를 만끽하던 그 시절이, 지금 창가에 희뿌옇게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우리의 추억여행은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단어사전만한 가곡집과 촐촐함을 달랠 수 있는 간식거리만 있어도 완행열차에 하루를 비러 떠나곤 했다. 산과 들을 찾아 대자연에서 우리는 시인이 되고 성악가가 되고 연극배우가 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회사 동료로 처음에는 ‘유 리 맹 고 최’ 성씨를 가진 다섯이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차’라는 동료가 우리 쪽을 부러운 몸 짖을 하며 다가왔다.
‘유리맹고최’는 차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맨 마지막 멤버라고 끝에 두자니 좀 소외시킨 것 같고 중간 어디에 끼워 넣자니 우리의 유일한 이름을 부르는데 음률이 맞지 않았다. 결국은 만장일치로 맨 앞자리를 내어 주고 ‘차유리맹고최’라는 새로운 이름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달라서 주변의 우려 섞인 눈총도 있었지만 이미 우리 여섯은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이 희한한 조합이 그렇게 동료애를 만방에 과시하고 인기를 누리던 시절도 몇 년! 야속한 시간은 흘러 평생같이 할 짝을 찾아 하나 둘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러나 웬걸, 그 때 부터는 커플들과 같이 지속적인 만남은 이어졌고 아기들이 생긴 뒤에도 숫자만 늘었을 뿐 계속해서 초보 아줌마들의 모임의 핑계와 소재는 더욱 더 다양해 졌다.
날씨가 좋은 날은 아이들 도시락 싸서 커다란 가방 둘러메고 유모차를 밀고 공원을 향했고 이도저도 여의치 않은 날엔 멤버들의 집을 순회하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낱낱이 쏟아내며 그동안 터득한 살림의 노하우를 나열하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기쁠 때나 힘든 일을 당할 때도 모두 한 가족 처럼 즐거워하고 ,버팀목이 되어 튼튼한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우정은 긴 세월 속에서 더욱 깊게 뿌리를 내려갔다. 아이들도 하나 둘 축복 속에 태어나고 새내기 주부들의 어설프던 살림살이가 익숙해 질 무렵 ,어느 해 겨울송별식이란 이름으로 여섯 가정이 마지막 자리를 만들고 우리 세 식구는 이민보따리 보다 더 큰 이별을 끌어안고 편도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헤어짐의 아쉬움도 잠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서투른 이민생활은 어느새 타성에 젖어 감성마저 무디어진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20여년이 흘러온 지금도 폭풍처럼 밀려와 침묵 한 채 머물다 사라져 가는 그리움의 파편들은 현실 끝자락에 메 달려 허한 가슴을 시리게 한다. 새로 장만한 소파의 가장자리는 벌써 속내를 하얗게 드러내고 있으나 양파껍질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타향에서 가슴깊이 꾸려온 봇짐은 아직 꺼내 놓지도 못한 채 오십 중반을 꺾어 지른 나이가 되었다.
아이의 엄마로 불리고 한 남편의 여자로 살면서 때론 이름을 잊고 살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시간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서로 다른 여섯의 이름! 그래! 나 없이 너희끼리 온전한 여행이 되겠니? ‘차유리맹최’이 어색하고 불완전한 이름으로...그래서 ‘고’를 넣기 위해 내 마음도 함께 갖던 거야 .그 추억의 겨울 여행을.....친구가 올려놓은 사진아래 꾹꾹 눌러 댓글을 단다. ‘차유리맹고최’ 건강해야 돼! 올 한해도 모두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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