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인생 47년...투자자와 약속이행 자부심으로 남아
▶ 1993년 포트리에 팬아시아 뱅크 창설
1990년대 말 팬아시아은행 클로스터 지점 개설식. 오른쪽부터 이사장 서진형, 행장 양문석
10개월만에 손익분기점 달성
토요 영업.프리체킹 어카운트 도입 혁신경영
서울상대 졸업, 한국은행.외환은행 근무 화려한 경력.인맥 자랑
지금 뉴저지는 한국계 은행들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운 몇 개 밖에 안 되는 한인 밀집지역에 BNB, BBCN, 뱅크 아시아나, 노아, 윌셔, 우리아메리카, 신한 등 지점들을 합치면 20개가 넘는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계는 물론 동양계 은행 하나 없던 이 지역에 소수민족 금융기관의 효시를 보인 인물은 단연 양문석으로 기록된다.
그의 주도에 따라 1993년 동양계 은행의 선두주자로 포트리에 창설된 팬아시아뱅크는 설립 초기부터 이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존 은행들의 영업시간이 9-5인데 비해 8-7로 3시간이나 서비스를 연장했고, 토요일에도 과감하게 문을 열었다. 타 은행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수수료 없는 프리 체킹 어카운트 제도를 도입했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 공용의 멀티 링궐 서비스도 시행했다.
창설을 앞두고 뉴욕의 한 동포은행이 문을 닫는 바람에 자본금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몇몇 동포 투자자들과 뉴욕의 재력가 티슈 패밀리를 설득하는데 성공, 2년 반의 준비기간을 거쳐 탄생했다. 이때 함께 뛰어 준 서울상대 후배 이영재와 첫 투자자 서진형의 도움이 컸다.
시기적으로 한인들의 인구가 학군 좋은 뉴저지 버겐카운티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한국계 종합상사의 지사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던 시기여서 양문석의 틈새시장 공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통상 신설은행은 3년 정도 지나야 순익분기점이 된다는 관측이었지만.
팬아시아는 놀랍게도 설립 10개월 만에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급성장을 한 이후로는 순탄한 가도를 걷게 되었다. 몇 년 안 되어 팬아시아뱅크는 모든 소수민족계 은행이 포함된 내셔널 뱅크 어소시에이션(전국은행가협회)으로부터 성공 케이스로 선정되어 수상했고, 양문석은 ‘뛰어난 아시아계 비즈니스맨 50명’에 선정되었다. 또한 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경영연구소의 ‘경영사례연구’에도 성공사례로 소개될 만큼 성장했다.
포트리 본점을 비롯, 팰리세이즈 팍, 저지시티, 클로스터 등에 지점망을 구축하면서 미동부 최대 아시아계 은행으로 우뚝 서겠다는 양문석의 꿈이 무르익을 즈음 전례 없는 미국계 은행, 내셔널 펜뱅크의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동포사회의 경제규모만으로는 자본증대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미국자본을 끌어들여 팬아시아를 마음껏 키워보고 싶었던 욕망이 결국은 내셔널 펜과의 합병을 이끌어냈다. 이때가 2000년도였다.
펜실베니아가 베이스인 내셔널 펜 은행과의 합병으로 팬아시아은행 주주들은 투자액의 3배에 달하는 이익을 손에 쥐면서 팬아시아의 명칭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합병 조건도 포함되었다. 합병 이후 3년간 양문석이 은행장과 이사장을 겸임하는 시기로 이어졌다. 버지니아주 한인 밀집지역 애난데일에 일곱 번째 지점을 오픈하고 나서 2003년 그는 은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얼마 후 은행은 우리아메리카로 매각돼 다시 한국계 은행으로 합병됐지만 팬아시아라는 이름은 그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팬아시아은행의 설립 동기는 동포사회에서 자라나는 젊은 1,5세, 2세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양문석과 함께 팬아시아 초창기를 이끌었던 행원들 가운데 유정환, 잔김, 양정인, 오수잔, 강전덕 등은 현재 뉴저지 은행가를 주름잡는 지점장급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결과적으로 설립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룩한 셈이고, 무엇보다도 힘들게 참여한 투자자들에게 약속을 지킨 점이 창설 초대 행장으로서 12년간 재직했던 그로서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게 되었다. 대학시절의 전공을 따라 은행과 보험 업무에 평생의 노력을 쏟아 부은데 대해서도 그는 후회가 없다. 양문석의 금융인생 47년은 누구에 못지않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1958년 서울상대를 졸업하면서 최고의 직장이던 한국은행에 들어가 외국부를 거쳐 홍콩지점 근무를 하면서 해외무역 금융지원 업무를 맡았다. 67년 한국은행 외국부가 외환은행으로 독립할 때 그 역시 외환은행 소속이 되면서 행장 비서실에 배치돼 홍승희, 홍용희 두 행장을 보좌했다. 워싱턴DC애서 열린 IMF 총회, 싱가폴에서 열린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도 배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꽃을 피우던 1972년 뉴욕지점으로 발령받은 시점이 그의 ‘40년 뉴욕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유일한 한국계 은행으로서 외환은행 뉴욕지점은 한국산 가발의 전성기를 맞아 수많은 동포 수입상들의 수출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맺은 인맥이 훗날 그의 보험업무와 동포은행 창립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 정착을 결심한 그는 74년 외환은행을 사직하면서 Aetna 보험회사에 입사하여 은행 상대의 금융사고보험을 취급했으며 이어 Campbell Brokerage의 수석부사장으로 승진하여 은행 자산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종합보험을 취급했다. 보험을 하면서도 금융계에 대한 매력을 떨쳐버리지 못한 그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뉴저지에 동양계 커뮤니티 은행이 전무하다는데 착안해 팬아시아은행의 창설 작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일선에서 은퇴한지 10년쯤 되는 요즘 그는 MYS컨설팅을 통해 신규 은행 설립을 위한 자문에 응하면서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달성된다’는 ‘심청사달(心?事達)’ 가훈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시집 ‘별이 되고 말까보다’를 87년에 발표한 부인(이경자, 이대 영문과 졸업)은 학교시절 배운 고전무용으로 양로원 위문공연도 하고 있다. 자녀는 2남1녀, 큰아들 병철(바비)은 LA에서 ‘퍼블리시 2’라는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고, 딸 은실(베티)은 뉴욕의 선물거래회사 제퍼리스의 수석부사장, 막내아들 호철(빌리)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부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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