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개척자의 길 외롭고 고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즐거워”
<사진 천지훈 기자>
한국에 일러스트레이션 학문 전파
교환교수.초청 강의로 바빠
SVA에서 드로잉과 수채화를 가르치며 국제학술프로그램 처장으로 20년 이상 일해오고 있는 앤드류 장 교수, 그는 한국에 일러스트레이션 학문을 뿌리내린 개척자이기도 하다. 교육자, 행정가,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은 거칠지만 따뜻하다.
▲쏟아지는 일, 재미있어
“매일 새벽 2시까지 글 쓰고 수업준비하고 그림 그리는 일이 즐겁다. 오는 6월 ‘아동미술 교육의 창의세계’가 출간될 예정이라 몹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언밸런스에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과정이고 잡히지 않는 것에서 잡히는 것이 ‘창의‘이다. ‘컴퓨터를 통한 그림이야기-아동미술 창의 동물그리기‘책도 동시에 나온다.”
근황을 말하는 앤드류 장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미술대학교(School of Visual Arts/SVA) 교수로서 지난 4년간 창의미술 콘텐츠 연구소(ACT, American Creative Trends, 대표 앤드류 장)를 통해 수집한 자료와 연구내용을 이번 책에 담았다.
앤드류 장은 미국 일러스트레이션계는 물론 한국의 일러스트레이션 역사는 그가 일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출간한 저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1993), ‘A Survey of illustration/ 공저, 2005), ‘셀프 스터디를 위한 온라인/ 오프라인 아동미술교육 시스템 개발‘(2000)은 한국에 일러스트레이션 개념도 없던 시절부터 대학의 일러스트레이션 교재로 쓰일 정도다.
SVA에서 수채화와 드로잉 교수, 국제학술프로그램 처장으로 20년 이상 근무하면서 한국과 스쿨 비주얼 아트의 다리 역할을 해왔고 수백 명의 한인 제자를 길러냈다. SVA를 거쳐 간 한국 유학생은 500명 이상으로 현재 한국의 스쿨 비주얼 아트 동창회에 100명이상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중 상당수가 대학교수이다.
뉴욕에서 자리 잡은 제자 중에는 월트 디즈니사를 비롯 유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거나 동화책이나 책을 출간하는 등 미국 디자인계를 리드하고 있다.그는 22~23년 전 디자인을 공부하는 유학생이 드물던 시절 3년정도 이중언어교육을 한 적도 있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장학금도 받게 해주는 등 한인 학생을 챙겨주었으며 수시로 한국대학에서 초청강의를 해오고 있다. 작년에는 6개월동안 한국 숭의여대 교환교수로 드로잉과 수채화를 가르치고 뉴욕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한 한국 일러스트레이션협회 회원들이 뉴욕으로 와 세미나 및 전시회를 하며 미국작가와 교류하게 했고 한국에 스쿨비주얼 아트 스쿨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국제프로그램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파인아트(CDF)에는 남미, 유럽, 아시안, 중국에서 60명이 3주간 여름학교를 수강하며 지난 5년간은 상명여대와 했고 올해부터는 서울과학기술대학과 복수학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학부 11학과, 대학원 21학과에 4,5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SVA는 교사 1,100명이 1,000개 과목을 가르친다. ‘창의’에 초점을 두는 학교로 세계 아트를 리드하고 있다. 늘 쏟아지는 일에 남들은 고생한다지만 나는 아직 재미있고 에너지가 넘쳐서 즐겁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즐겁다는 그는 의외로 험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아왔다.
▲뉴욕 개척정신은 삶의 원천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아버지는 6남매를 키우며 이른 새벽이나 주말이면 산을 개간하고 흙벽돌로 집을 짓고 과수원을 일궜다. 뉴욕에서 개척정신은 아버지의 유산이자 내 삶의 원천이다. 그래서 외롭고 고된 이방인의 삶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같다.”
여수골에서 태어나 미술교사인 아버지와 노래를 잘 부르는 어머니, 고향 과수원에서 별을 보며 우애를 나누던 6형제, 그의 가난하나 순박했던 어린 시절 추억은 외국생활 30년간 내내 그립고 아련한 꿈으로 남아있다. 앤드류 장은 미술 하면 춥고 배고프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대를 갔다. 홍대 미대를 2년 다니다가 입대를 했고 1979년초 독일 쾰른으로 유학을 가고 1년반동안 혹셔레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다시 캐나다로 가려고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장례용 관을 만드는 공장 일용직으로 취직해 나무를 켜고 압축기로 나무를 접착하고 전기못질, 관에 퍼이퍼질과 니스칠을 하며 부상도 당했지만 그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두달간 공장생활의 체험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후일 캐나다에서의 지렁이 잡이도 소재가 된 것은 물론이다. 그후 캐나다로 가서 성당에서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 안드레아(Andrew)를 받은 이후 그는 앤드류 장으로 이름을 쓴다.
배관 제도사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는데 앨버타 미술대학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공부를 시작하자 더욱 바빠졌다. 학교에 다니니 제도 일은 저녁에 집에서, 주말에도 12시간 정도씩 일을 하면서 그림도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크릴을 이용하여 일러스트레이션과 작품을 그렸으나 점차 수채화도 그리게 되었다. 1984년 방학 2주동안 뉴욕의 디자인을 배우고자 업스테이트 매리 마운트 대학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션 워크샵에 온 것이 뉴욕 이주 동기가 되었다.
1985년 뉴욕으로 와 SVA 대학원생 시절에는 지도교수의 인정을 받아 첫 학기말부터 한달에 한두개씩 뉴욕타임스에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게재했고 새벽에 풀톤 어시장을 찾아가 현장 스케치를 하여 그린 시리즈는 공모전에 당선, 미국 디자인지 ‘How’에 기사와 함께 실렸다. 이후 미 유명잡지와 신문 등에 일러스트레이션 의뢰를 받는 등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앤드류 장은 틈틈이 수채화도 그려 1999년 내셔널 아트클럽 개인전을 비롯 뉴욕과 한국 등지에서 7번 개인전을 하며 ‘영혼을 그리는 작가’로 불려지게 된다. 실제 보고 느낀 감성을 표현해서였다.
앤드류 장은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는 뉴욕에 와서라고 한다.“뉴욕에서 1985년부터 공부하며 맨하탄 한인델리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커피와 차를 내는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1인 3역을 했던 시기인데 아무리 고생해도 그때 희망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고 내 그림도 인정받아가는 시기였다.” 그동안 아빠와 엄마 사이를 오가며 자라 늘 미안해하며 키운 딸들은 치과의사, 디자이너, 대학원생이고 막내아들은 이번에 대학에 간다.
“내년이면 60이 되는데 아이들도 다 커서 부담이 없다. 계속 좋은 것만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고갈이 안되고 늙지도 않는다”는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뿌린 대로 거둔다, 모두에 감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30년 이상 외국땅에 살면서 남보다 3배로 살았다. 일도 3배로 했다. 하지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화가이고 교수지만 학생 입장에서 자신이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세 시간씩 SVA 평생교육원에서 드로잉을 배우는 것이다. “전문적인 교과서까지 출간한 마당에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됐다고 한 순간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 아는 것 같은데 학생 자리에 앉으니 배울 게 많이 보인다.”
“아동미술에 대해 책을 쓰면서 아동테라피, 미술사도 공부하고 다른 책도 모두 찾아 읽는다. 삶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몰랐던 것을 배우면 엔돌핀이 나온다.” 앤드류 장은 자기 분야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서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곤고한 삶, 그러나 행복한 삶이 보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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