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삼성그룹 이건회 회장의 맏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일요일에 장난감 ‘티라노킹’을 사기 위해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시내 한 백화점 완구매장에 들렀다는 것이다.
말 한 마디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사람 많은 주말에 직접 온 데다 의외로 모자의 수수한 차림에 놀랐고 이 사장이 완구점에서 다른 엄마들과 스스럼없이 장난감에 대해 묻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특히 수행비서가 있는데도 뛰노는 아들의 땀을 닦아주고 장난감을 여러 개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자꾸 그러면 그냥 갈 거야”라며 혼내는 모습에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은 친근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했다. 이 사장이 1시간가량 머문 후 떠날 때 주위 엄마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다른 별나라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달리 봤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리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가뜩이나 재벌에 대한 인식이 곱지 못한데 조 전 부사장의 ‘갑질’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막무가내 오너십에 국민의 분노 게이지는 한계점까지 올라갔고 특히 은수저를 물고 나온 검증되지 않은 재벌 3~4세에 대한 시선은 한겨울 냉기처럼 싸늘해졌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달리 이 사장처럼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재벌 3세들의 얘기도 들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최태원 SK 그룹 회장의 차녀 민정씨의 경우가 그렇다. 민정씨는 재벌가 자제 중 최초로 해군장교로 자원입대해 힘든 훈련을 마치고 해군장교로 당당히 임관했다. 이도 모자라 해군 부서 중 가장 어렵다고 소문난 함정승선 장교를 지원해 한국형 구축함인 충무공 이순신함을 탄다고 한다. 아버지의 재산에 지배당하지 않는 민정씨의 소신 있는 행보에 국민들은 진심 어린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최 소위의 늠름한 경례 모습에서는 “재벌이 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웅변하는 듯한 당당함마저 느껴진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재벌가의 편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필자가 2006년 신세계 그룹 출입 당시 기자단 간사를 맡아 정 부회장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당시 정 부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맥주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는 등 격의 없이 잘 어울렸다. 오너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친밀감 있고 상당히 겸손했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거들먹거리는 재벌가 자제의 ‘황제경영’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정 부회장이 얼마 전 신세계가 오픈한 ‘노(No) 예약’ 시스템 수제 맥줏집 ‘데블스도어’에 왔다가 대기자가 많아 본인도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손님들이 알아보자 불편을 끼칠까 봐 그냥 되돌아간 사실도 정 부회장의 소탈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함영준 오뚜기 회장의 딸 연지양도 재벌가 자제라면 당연히 회사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저 멀리 날려 보낸 경우다. 뮤지컬 배우를 동경해 온 연지양은 오랜 기간 많은 오디션을 봤고 최근 대작 뮤지컬의 주연급으로 캐스팅돼 공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부러울 것 없는 오너가의 자제지만 꿈을 위해 자신의 실력만으로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선 것이다.
재벌을 편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연히 조 전 부사장 같은 잘못된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반기업·반재벌 정서 확산은 능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시급한 과제인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국론 분열을 부추길 뿐이다. 대신 재벌가는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낮은 자세로 우리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국민들은 좀 더 관용의 마음으로 재벌의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 주면 어떨까.
“권위는 권력이 아니라 품위에 가까운 위엄이다”라는 최연홍 시인의 말이 작금의 재벌 3~4세들이 새겨들어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은수저를 내려놓은, 존경받는 재벌 기업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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