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이긴 사람은 나밖에”
70년대 후반이다. 많지 않던 한인들 중에서도 워싱턴의 바둑애호가들은 서로 열심히 연락도 하고 주말이면 열성적으로 모여서 바둑을 두곤 하였다. 그러나 모일 장소가 여의치 못했다.
다들 이제 갓 미국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라 좁은 아파트와 셋방살이 신세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바둑꾼들은 담배를 심하게 피워대어 안주인들의 불평 섞인 성화에 한 장소에서 오래 바둑 두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차 선뜻, 자택을 바둑 장소로 내어준 분이 있었다. 워싱턴 바둑계의 대부 이종수 박사님이다. 고령의 연세에도 지금도 열심히 바둑 두러 다니시는 이 박사는 당시 유학생으로 도미하여 수련의를 거쳐 전문의사(산부인과)로 근무하던 분이다. 당시는 한국이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다들 어렵고 힘든 때에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하여 포토맥 강가에 예쁜 집을 갖고 계셨다. 한국분이 이런 멋진 집에서 살 수도 있구나 하며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받기도 하셨다. 그런데 바둑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판을 벌리던 분이시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워싱턴에서 조남철 국수를 이긴 사람은 나밖에 없을 낀데…내가 그때는 빡 쎄게 두었거든” 하면서 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무슨 대단한 바둑대회나 한다고 여럿이 모여 심각하게 바둑을 두다보면 온 집안 내에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부인의 고충이 얼마나 심했을까 한다. 그래도 싫은 기색 안보이시고 바둑꾼들을 받아주신 미세스 리. 이제는 오랜 추억이 되었지만 지면을 통해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드리고 싶다.
-호방한 기풍의 승부사
이종수 박사 자택에서 바둑 두던 시절, 잊지 못할 또 한분의 바둑 고수가 계셨다. 이 박사와는 막상막하의 호적수다. 바둑 두어서 이기면 당연한 실력이고 바둑을 지면 실수 때문이라 하시던 김호길 박사님이다. 핵 물리학자인 김호길 박사는 당시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셨다. 80년대 초반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포항공대를 창립하고 총장으로 근무하셨다. 물리학계의 큰 별로 노벨상 후보 명단에도 오르셨던 분이라고 기억하는데 94년 불의 사고로 절명하셨다는 소식에 애석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바둑도 상당한 고수로 엄청 호방(豪放)하게 두었다. 한번 지면 다시 이길 때까지 계속 두자고 붙잡으시는 바람에 나중에는 그 기염(氣焰)에 질려서 이기기를 포기해야하는 대단한 승부사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지셨던 분이다.
그런 신념이 있었기에 한국의 최고 가는 포항공대를 세우고 한국 물리학계의 큰 별로 족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시절, 다시 한 번 김호길 박사님의 명복을 빌어본다.
필자: 풍운재 최환정(미국명 Charles Choi)
1975년 도미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미 동부지역 바둑대회 우승(1985년)
워싱턴한인회 바둑대회 우승(1989년)
워싱턴 바둑왕전 우승(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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