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둑대회가 열린다고 하기에 기원에 나가보니 누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정기용 씨다.
“아이구 형님. 오랜만입니다.” 하니 다짜고짜 바둑부터 한판 두잖다. “요즈음 한국에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며 반색을 하니 잠시 다니러 오셨단다.
기억은 30년도 훨씬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는 한국일보를 빼고 나면 동포언론이 귀하던 시절이다. ‘한민신보’라는 신문사가 버지니아 알링턴에 있었다. 간간이 한국뉴스와 한인들 소식과 광고를 실어주던 주간지 비슷한 간행물이었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세상이었다. 주로 주미대사관과 미국 언론을 통해 한국 관련 뉴스와 소식을 간간이 들으면서 모국소식에 목말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한글로 접하는 한인언론이 얼마나 소중하고 반가운 존재였을까.
마침 당시 알링턴에 ‘코리아하우스’라는 작은 한국 마켓이 생겨서 쌀이나 김치 등 한국식품을 구하려고 가끔 찾아갔다.
그 집 이층에 한민신보 사무실이 있었다. 코리아하우스에 들를 때마다 겸사겸사해서 들러 신문을 열심히 가져다 보곤 했다. 정기용 씨가 바로 한민신보 발행인이셨다. 조그만 사무실에서 혼자서 편집하고 배달하고 원고 쓰고… 1인3역을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바둑을 무척 좋아하셔서 나만 보면 한판 하자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는 한국의 유신독재가 한참이었다. 한민신보는 반독재 민주화 기사를 자주 실어서 대사관 직원이나 주재원들 사이에서는 ‘반정부 신문’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당시 한민신보 주필로 활동하시던 분이 한분 계셨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 바둑을 잘 두셔서 워싱턴 최고수라고 칭할만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 분이 최성일 씨다.
나와는 종씨에다 형님하고도 친구 사이여서 자주 어울려 바둑을 많이 두었다. 60년대에 일찍 국비장학금으로 유학 오셔서 캔사스 대학에서 학위를 따고 뉴욕 호버트(Hobart)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셨다.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으셔서 재미 한국인권연구소에 관련하시기도 했다.
80년대 초중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워싱턴 체류(滯留) 시절에는 미국 조야를 상대로 많은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서울대 학생이었을 때에는 바둑부 선수였다고 하는데 바둑 두실 때면 이상한 묘수를 자주 두어서 상대방을 혼란(混亂)에 빠트리게 하는 특기를 가지셨다. 바둑판세가 비세(非勢)하거나 불리할 때는 마구 혼전(混戰)으로 몰고 가 끝까지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판세를 만들어 승부를 뒤집는 힘 바둑을 잘 두어서 옆에서 관전하던 고영일 고수는 “저 친구하고 둘 때는 말이야. 판 흔드는 것을 조심하면 돼” 하고 슬그머니 훈수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최 교수님과 고영일 씨는 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최성일 교수는 망명객 신분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와 한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분이신데, 너무나도 애석하게도 1991년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고인이 되셨다.
살아계셨으면 지금쯤 큰일을 하셨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고인은 버지니아 페어팩스 메모리얼 파크에 잠들어 계신다. 나의 친부모님과 같은 곳에 안장되셔서 가끔 들러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성일 형님. 언제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바둑 한번 두시지요.”
그 외에도 한민신보 시절 자주 모여서 바둑시합을 벌이던 고수들 중에는 최창훈, 이종석, 김성봉, 고영일, 강홍식 씨 등이 있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바둑 삼매경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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