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볕이 기분 좋았던 지난 주말 애플 피킹을 다녀왔다. 집에서 1시간 가량 서쪽에 있는 곳이었다. 추석이라고 해도 별 특별한 계획을 잡고 있지 않던 차에 시집간 큰 딸 아이가 전화를 했다. 여러 과수원 중 적당한 곳을 찾고 정보를 챙기고 출발 시간을 정하는 일까지 큰 애가 다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내가 하던 일이 자연스럽게 아이들 몫이 됐다. 이게 인생이구나, 잠시 소회에 빠졌다.
한적한 시골의 과수원을 기대했는데 도착해서는 놀랐다. 널따란 비포장 주차장이 수백대는 됨직한 차량들로 가득했다. 가족 단위의 인파가 붐볐다. 줄을 서서 비닐 백을 사서 들고는 과수원 안으로 향했다. 후지부터 골든 딜리셔스, 레드 딜리셔스 등 사과를 땄다. 아내는 처음에 5파운드 가량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의 비닐 백 하나에 13달러를 내는 걸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어른 키 1배반 가량의 사과나무들 아래로 즐비하게 떨어져 있는 사과들과 높은 데 것을 따겠다고 뛰는 어른과 아이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며 ‘그만큼은 받아야 되겠네’ 마음을 고쳐 먹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 딱 맞았다. 우리도 땄다가 맘에 들지 않는 사과는 주저 없이 나무 아래 고랑에 버렸다. 크지 않은 봉지에 알차고 예쁜 사과만 담아야 했다. 최대한 많이. 낙과든 버려진 것이든 과수원에서는 별도로 모아서 사이다도 만들고 도넛도 만들 거라는 짐작은 해도 애써 키운 사과가 뒹구는 모습이 농부에겐 마음 편할 리 없을 터였다.
참 오랜만의 애플 피킹이긴 한데 사과 따는 일은 잠시, 풍경과 미국의 시골에서 즐길 수 있는 각종 놀이와 그곳서 먹어서 더 달콤한 애플 도넛과 케틀 콘이 좋았다. 포니 라이드, 헤이 라이드와 옥수수 밭에 만들어 놓은 미로는 다분히 상업적이긴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시골 마을을 떠돌며 노래함 직한 조금은 늙어 보이는 5인조 밴드의 목 쉰 컨트리 송까지 모두가 가을의 수확을 즐기는 듯한 기분 좋은 장면들이 누런 옥수수 키 높이의 지평선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그날 밤 미국 밤 하늘의 추석 달을 보았다. 마침 슈퍼문(Supermoon)에 월식이라고 미국 뉴스에서 몇 차례 보도한 덕에 꼭 봐야지 했다. 20세기에 5차례 밖에 없었고 21세기 들어서는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33년 만의 장관이고 다음 슈퍼문-월식 현상은 2033년에야 발생한다고 한다. 구름이 조금 끼긴 했어도 달은 보였다. 막 떠 오를 때는 유난히 커 보이더니 월식 때는 슈퍼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저 그런 달이었다.
밤하늘의 천체 쇼라는 것이 늘 그랬다. 아이들 어렸을 적 유성우가 내린다고 밤새 동쪽 하늘을 보다가 목만 뻐근했던 기억이 났다. 늘 그랬지, 하면서도 2033년을 헤아려 본다. 그때면 내가 몇살이지.
추석과 슈퍼문과 월식, 그리고 씨 뿌리는 일 없이 거두기만 한 우리 가족의 조그만 추수 활동, 애플 피킹까지. 그 땐 별거 아니다 싶었는데 되돌아 보니 그 날 하루 자연과 인위의 조합은 다시는 맞을 수 없을 특별한 것이었다. ‘지난 것은 항상 그리워 지느니라.’ 푸쉬킨의 말이 왜 명언인줄 알겠다. ‘추억 만들기’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와는 무관하게 이 제목은 소중한 그리움의 생산이다.
10월이 시작됐다. 과수원들에 따르면 2일부터는 거의 모든 종의 사과를 딸 수 있다. 애플 피킹은 10월말 까지는 가능하지만 중순 이전이 좋다. 다음 주가 아마 피크겠다. (입장료 없이 사과 담을 백을 파는 곳이 좋다. 먹고 올 거면 이 백도 사지 않아도 된다.) 어느덧 황량해 진 텃밭과 크게 짧아진 낮과 길게 머무는 아침이슬이 겨울을 준비하라 재촉하는 것 같다. 거두는 계절, 거두어 예비하고, 기억으로 남기는 좋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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