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가을은 왔고 또 깊어간다. 당신이 가을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짧은 뉴욕의 가을 속으로 빠져야 한다. 막 가을을 느끼는가 싶을 때 어느새 겨울의 삭풍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겨울이 마냥 싫은 건 아니다. 산천초목 위에 내리는 겨울도 운치는 있지만 뉴욕하고도 Manhattan 스카이 라인 위에 떨어지는 겨울은 두 눈으로 보지 못하면 공감하지 못한다. 그 장면은 어디에서든 아까울 만큼 감동적이다.
Brooklyn에서 278을 타고 오면서 보는 장면, Queens에서 495로 가면서 보는 장면, 뭐 하나 뺄 수가 없다. Bronx나 뉴저지에서 보는 스냅도 일품 중 하나다.
서부보다 동부가, LA보다 뉴욕의 감각이 더 짙게 가슴으로 오는 건 겨울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건 짧지만 강렬한 가을을 건너야 한다. 김동명의 절창(絶唱)이 가슴을 울린다. “내 마음은 낙엽이오/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정말 잠깐 뜰에 머무는 가을이다. 그래서 더욱 가을이 외로운지 모르겠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청춘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청춘은 고사하고 중년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하여 마더 테레사는 고독을 가난으로 정의했고 그 말에 동의한다. “가장 처절한 가난은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과 외로움이다.” 테레사가 고독을 알까 싶었지만 그도 역시 고독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어루만짐은 가로 세로의 줄이 얼굴에 가득할 때, 게다가 찾는 이가 없을 때였음을 고백했다.
황혼으로 가는 친구 셋이 둘러앉아 며칠 새 죽을 뻔한 경험담을 말했다는 조크가 있어서 각색해보았다. “아, 나는 지난여름 애들 가족과 바다에 갔는데 물에 빠져 죽을 뻔했어.” 다음 친구가 말했다.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나? 지난 달 교통사고 났잖아. 시력이 이젠 달라졌어. 죽을 뻔했어.” 마지막 친구가 심각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더위가 가시더니 가을이 성큼 오지 않았나 싶더군. 가을이라니, 갑자기 외로워 죽을 뻔했어.”
선각자가 말했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사실 고독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고독이라는 병에 시달린다. 더욱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외로움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을이 고독으로 가는 빠른 통로라는 사실이다.
중년까지는 “정신없이 삽니다. 정말 바빠요.”가 어울리는 대사다. 그러나 중년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시대는 바쁘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스개로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들을 하며 서로 위로하지만 무엇이 노년을 과로사할 정도로 바쁘게 하는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 약속이 많긴 하지만 다 실속 없는 우울한 허세들이다.
점점 가을을 기다리지 않는다. 가을 겨울을 예찬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두렵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황혼은 더 짙어지니까. 어느새 70마일 80마일, 속도감으로 정신이 없다.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벌써 두꺼운 옷을 찾는 마련으론 세월이 무정하다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그러면서 더 분명한 것은 내세를 생각하는 진심의 폭이 훨씬 깊어졌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인(哲人) 사르트르는 어떤 말년과 어떤 최후였는가.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의 병명을 묻지 않고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는 불세출의 철학자였지만 끝내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에 비참한 말로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세평을 들었다.
“돌아갈 고향”, 추상적인 개념 같지만 사실은 구체적이고도 명료한 개념이 아닌가. 이 개념은 나이를 막론하고 붙잡아야할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을 석양을 받으며 걷는 인생은 반드시 생각해야 할 화두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가을은 자기의 뜨락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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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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