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은 설이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우리의 고유명절은 무시할 수 없어서 떡국도 끊이고 설음식도 장만했으며 낮에는 플러싱 메인 스트릿에 나가 설 퍼레이드도 보았다.
어둑해지는 시간,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북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신밟기 팀이구나’ 직감하여 밥 하다말고 맨발에 신발을 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맛있는 것 먹으러 갈래?”, “재미난 구경 갈래?” 하면 밥을 굶고라도 구경거리 쫓아가던 버릇대로 혹시 그 사이 끝날 새라 부랴부랴 갔더니 잔칫집에서 판이 한창이었다.
“주인, 주인, 문여소, 복 들어가니 문여소, 문 안열면 갈라요.” “드리세, 드리세, 만복을 쳐드리세.”, “운수 대통하고 올 한해도 잘 살아보세.” 그 잔칫집 원조 할머니가 가게 한가운데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고 할머니를 에워싼 풍물패들은 온몸이 땀에 젖어 상쇠 역을 맡은 정승진씨의 ‘서로 도와 한인 공동체 만들어나가자’는 풀이에 따라 풍물을 치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의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새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에 파랑과 노랑 채복(綵服)띠를 두르고 머리는 노랗게 물들였거나 까만 색, 비더레즈(Be the reds) 붉은색 두건을 쓴 채 싱글벙글 웃으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이 지신밟기는 옛부터 내려오는 한국 풍습으로 정월 초부터 대보름까지 주로 하는데 나쁜 것을 물리치고 만복과 건강,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마을 잔치이다. 맨 앞에 깃발 든 기수가 서고 다같이 지신(地神) 노래를 부르면서 동네를 한바퀴 돌면 집집마다 술, 음식, 곡식이나 돈을 내놓아 구경꾼과 풍물잡이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어울렸고 이 자금은 모든 이의 이익
을 위해 쓰여졌다.
이날, 퍼레이드를 마친 풍물패들은 ‘힘찬 새해’라고 쓰인 깃발을 앞세우고 오후 1시부터 저녁 5시30분까지 유니온 상가는 물론 노던 블러바드 149 플레이스까지 한인업소 30여군데를 찾아 복을 빌어주고 주위 타인종에게 영문과 한글로 된 ‘지신밟기’ 전단을 배포하며 우리 문화를 알렸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지요. 같이 춤도 추고 가게 안으로 데리고 가 음식도 대접해 줍니다. 조금씩 정성도 표해주시지요.”
10년 전만 해도 종교적 이유나 관심 없던 한인들이 이제는 할로윈 데이에 귀신 복장한 아이들이 캔디를 얻으러 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가는 것같다고 초창기부터 청년학교 비나리를 이끌어온 정승진씨는 말했다. 또 이들이 모은 성금은 고스란히 불우이웃에게 전달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는 9.11테러로 피해
입은 동포들에게 전해졌고 올해에는 유엔 세계식량기구에 전달된다.
그러나 아직도 판에 뛰어들기에는 어색해 멀리서 구경만 하거나 쳐다보면서 미소만 짓고 있는 한인들이 많다. 무표정, 무관심이 한인들 특유의 표정이긴 해도 이러한 놀이에는 구경꾼들이 장단 맞춰주고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사람이 더욱 신나는 법이다. 뿐인가, 누가 내게 이처럼 정성으로 장사 잘 되라고, 부자 되라고 빌어주었던 가를 떠올려보자.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같은 한인이라는 것만으로 신년 한 해를 축복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안그래도 오래된 경제불황으로 장사가 안되고 있고 각종 보험료와 벌금 인상으로 생계가 위협받고 있는 마당이 아닌가.
오는 8일에는 맨하탄 32가 한인상가에서 지신밟기를 한다고 한다. 이번에는 MIT ‘우리’ 풍물패 등도 합세하여 청년학교 ‘비나리’, ‘한울’ 풍물패, 뉴욕대 ‘누리’, 스토니브룩 ‘덩더쿵이’, 필라델피아 ‘소리몰이’, 2세들의 ‘다드래기’ 등 젊은이 40명 이상의 대규모 풍물패가 맨하탄 거리를 우리의 춤과 노래, 소리로 뒤덮을 것이다.
우리 정서를 알고있고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한인이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오랜만에 한국의 징, 장고, 소고, 꽹과리, 북 소리를 실컷 들으며 마음 속 깊이 쌓인 체증도 풀고 봇물처럼 터져 오는 희망을 가슴 가득 받아들이자.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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