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카투만두’의 밤은 너무도 신비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1962년 8월24일 한국인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내딛는 순간의 밤이었다.한국 실정이 너무나 어려운데다 당시 해발 2,000m도 안 되는 국내산만 오르던 우리 원정대는 해발 6,000∼8,000m의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극동 최고봉인 3,997m의 대만 옥산에서 고산 등반 경험을 쌓은 후 히말라야를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4.19 학생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그 뒤를 잇는 장면 정권도 무능으로 1961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는 등 1년 사이에 정권이 3번이나 바뀌는 등 당시 한국 사회는 참으로 비참했다. 필자는 이런 혼란 상태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히말라야 등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61년 여름 마침내 네팔 외무성으로부터 히말라야 등반 허가 및 입국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여권을 발급 받기 위해 승인이 필요했던 문교부가 위험한 곳에 왜 가느냐며 허가를 안 해주는 탓에 허가를 받기까지 6개월간의 세월이 걸렸다.
1962년 3월말에 간신히 문교부의 허가를 얻어 여권을 발급 받았으나 막상 돈 한 푼 없는 상태였다.무엇보다 국산장비가 하나도 없는 때라 전부 외제에 의존해야 하는데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구입해야 할 지 몰랐고 외화 송금이 불가능한 시절이라 외국으로부터 장비를 구입하는 것 조차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 4명은 그해 8월15일 서울을 출발했으나 히말라야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태국 방콕에 도착, 인도 대사관에 경유 비자를 신청했더니 양국간 국교가 없어 한국 외무부의 허락 없이는 비자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우여곡절 끝에 허가가 떨어져 항공편을 이용, 캘커타까지 간 후 다시 기차로 밤새 달려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 도착, 덜그렁거리는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렇게 고대하던 히말라야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꼬박 9일 만이었다.
한국 산악계의 히말라야 진출의 첫날 밤 필자는 기쁨도 잠시 뿐 공연히 쓸쓸하고 외로움이 밀려왔다. 한국의 산악 발전과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패기, 진취적 기상인 개척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히말라야 처녀봉 하나쯤에 태극기를 휘날려야 겠다는 각오를 했다.
7,000m 이상의 처녀봉 등반을 놓고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때에 우리는 너무 빈약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962년 8월31일 카투만두를 떠나 히말라야 등반 길에 올랐고 그로부터 필자의 6번에 걸친 히말라야 도전이라는 큰 드라마가 시작됐다. 이는 필자 자신의 등반사인 동시에 한국 산악의 히말라야 진출사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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