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이라 밥 짓기도 좀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출근해야 하는 식구가 있고, 아침은 건너뛰더라도 점심은 먹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선잠을 털고 일어났다. 비몽사몽간에 쌀을 씻으려고 수돗물을 틀었다.
그런데 쌀바가지에 물이 채 차지도 않았는데 왼손 바닥으로 자꾸만 물이 흘러내렸다. 찬물의 촉감과 함께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가지 밑을 들여다보았다.
긴가 민가 했는데, 어느 새 깨졌는지 바가지 밑에 아주 가느다란 실핏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세게 던진 적도 없고, 떨어뜨린 적도 없는 바가지가 깨어지다니. 게다가 던져도 안 깨어진다고 선전하는 특수 플라스틱 바가지가 아닌가.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던 주황색 쌀바가지. 크지도 작지도 않는 알맞은 사이즈에 높지도 낮지도 않아 다용도로 쓰였던 쌀바가지였다. 나랑 동고동락 해 온 지가 몇 해인가.
쌀을 밥솥에 앉히고 부엌일도 끝났는데, 나는 바가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쓰레기통 앞에 서 있었다.
선뜻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다 헤어져 못 입게 된 옷이라도 그 옷에 얽힌 추억이나 사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다시 옷장에 넣어두는 심정이랄까.
못 쓰게 되었다고 온갖 잡동사니와 냄새로 범벅이 되어있는 쓰레기통에 훌쩍 던져버리기에는 너무나 미안했고, 아쉬움 또한 컸다.
하지만 어쩔거나. 쓰지 못하는 바가지는 버려야지. 재가 되어버린 추억을 강물에 띄우듯, 알콩달콩 맺었던 정도 잊어야겠지.
나는 삼년간 정들어왔던 쌀바가지를 쓰레기통에 훌쩍 던져버렸다. 저만이 가졌던 역사와 한 생명이 이제 끝났다. 권리는 한번도 행세하지 못하고 오로지 제 의무에만 충실했던 우직했던 한 삶의 말로가 쓰레기통 속에서 마감되다니. 살아 생전에 단 한번의 애정 어린 눈길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제 생을 마감한 슬픈 목숨을 연상시킨다.
그동안 무심히 보아왔던 하나의 사물도 우리와 같이 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 생물체다. 그걸 나는 오늘 비로소 깨달았다.
요즘 따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물 하나 하나에도 애정이 가고 어줍잖은 이별 하나에도 두 배의 아픔과 감상이 인다. 이는, 우리 집이 아파트 건축 업자에게 팔리고 에스크로에 들어가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진 심적 변화이다.
바가지의 유한 생명과 그와의 이별을 지나치게 애석해함도 이런 심리의 여파가 아닌가 싶다.
부동산 붐을 타고 집 값이 올랐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나와 인연을 맺고 눈맞춤 했던 모든 것들이 포크레인에 깔려 뭉개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사람과의 이별도 섧지만, 물을 주고 키웠던 나무며, 밭이며, 굴러다니는 잡동사니까지 한번 더 둘러보게 된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은 시간에 들어와 제대로 돌보지 않던 내 마음도 이러한데,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짐승 밥을 챙겨주고, 울타리 담 하나 하나에 직접 못질한 남편의 마음은 오죽할까. 방에 들어와서도 계속 시무룩해있던 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자기야, 사물들도 생명이 있는 것 같아.”
“사물이 무슨 생명이 있어? 생명이 없으니까 사물이지.”
“아니야, 사물도 저만이 가진 유한한 생명이 있어. 그리고 저만이 가진 삶의 역사가 있어.”
“?”
“애정을 가지고 보면, 생명을 가지지 않는 게 없어. 왜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았을까?”
“……”
지희선
약 력
▲문학세계 수필당선
▲수필과 비평 수필 신인상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