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가을이다. 가을나무가 그 잎을 벗어버리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 낙엽이 깔린 명상의 오솔길을 끝없이 걷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이 손짓한다. 가을 바람과 가을의 고요, 아름다운 단풍이 길 떠날 차비를 서두르라 한다. 시간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감나무에, 석류에, 도토리알 위에 앉는다. 무성하던 여름날의 소망들이 꿈처럼 영글어 가을은 익어 가는 열매로 침묵한다.
깊어 가는 가을과 인생이 맞물려 가는 이 계절에 문학기행이 있었다. 서울에서 오신 J 수필가와 R 시인을 모시고 2박3일 일정으로 매머드 레이크와 데스밸리를 다녀 왔다.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듯한 자유로움에 젖어 숲과 나무의 향기가 그윽한 산장에서 가진 문학 강연은, 우리의 삶과 문학에의 자세를 한 단계 격상시켜 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단풍의 절정을 맞은 은사시나무를 보았다. 비숍 북쪽, 매머드 레이크로 가는 도로 일대를 화려한 황금빛 물감으로 물들여 놓은 은사시나무. 가슴을 꽉 막히게 하는 황홀한 비경이었다. 가을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화사한 잎새들이 마른 바람결에 팔랑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우리 인간도 그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작은 잎새와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조락의 의미가 인생과 결부되는 때 마음이 쓸쓸하다. 봄의 생동감과 푸르름의 여름을 지나 우수의 가을을 맞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이루며 봄, 여름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상념에 사로잡히게 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왜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울까. 지는 해, 가을 단풍, 떨어지는 낙엽. 그들은 아름다운 종말을 준비하기 위하여, 또 다른 삶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서녘 하늘에 노을이 지고 노랗고 붉은 잎들이 자연에 의해 다스려진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위해 스러져 가는 아름다움이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 가을은 만상을 그의 품에 포옹한다.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 은사시나무의 떨림 속에 들려온 시인의 소리다. 바람의 소리다. 우리들 지친 영혼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힘찬 속삭임이다.
이번 여행에서 매너가 깍듯하고 콧수염이 멋진 신사를 만났다. 나는 그를 두령님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탔던 버스의 기사 S씨이다. 버스 기사로서의 프로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분. 여행을 하며 많은 기사를 보았지만 이 분처럼 말을 아끼면서도 친절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어지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분은 처음 보았다. 우선 그는 박학다식했다. 가이드가 없는 버스 여행에서 그때그때 꼭 필요한 정보를, 설명을, 쉽고 짤막하게 곁들여 주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분은 100여장이 넘는 CD를 가지고 있었다. 클래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샹송, 팝송, 가곡, 대중 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가지고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바깥 경치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여 들려주었다. 길고 지루한 버스 여행에서 여행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다.
여행을 할 때 사람을 잘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가깝게는 옆자리에 동석한 사람에서부터 동승한 사람들, 가이드나 운전기사.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두령을 잘 만나 얼마나 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했던지 그것은 진정 행운이었다.
어떠한 일에 종사하던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방면에서 으뜸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그 일을 사랑한다면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자고 나니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은 알차고 즐거웠던 여행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단단히 영글은 열매처럼 무언가 가슴에 충만하게 채워진 수확을 안고 돌아 온 여행 -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마음에 긴 여운이 남는다.
유숙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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