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땐 딸 많은 집 귀한 외아들이라 버릇이 나빠진 나는 쌀밥에 콩이나 보리쌀 몇 개 섞였다고 울고 투정을 부렸었지. 지금은 구수한 보리밥이나 콩밥을 더 좋아하지. 또 호박전 같은 것을 먹을 땐 고소한 껍데기만 벗겨 먹었었고, 찐빵 같은 것을 먹을 땐 꾀죄죄한 손가락으로 얄밉게도 단팥속만 빼 먹었었지. 그런데 지금은 모두 먹고 끝까지 먹지.
조금 더 자라 초등학교 다닐 때 산과 들 시냇가에 가면 움직이는 것은 모두 모두 잡으려 했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려 했지. 그런데 지금 먹을 것이 지천인 미국에 이민 와서는 잡은 물고기도 더러 놓아주고, 꽃을 보고도 꺽지 않을 때도 많이 있을 뿐더러 늙어서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지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게 되었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서양적인 것만 좋아해서 우리 나라 전통음악은 음악 같지도 않았고 침이나 한약은 영 믿기지가 않았었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한가지만 옳거나 그 길만이 외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 또한 미신처럼 생각하던 명당사상, 풍수, 관상, 무당, 제사 등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땐, 단 것 고소한 것, 울긋불긋한 것, 우선 쉽고 편한 것을 좋아했었고 누가 쎄냐, 누가 더 약하냐, 누가 이겼냐, 누가 졌냐,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우리편인가 등등, 단순하기 짝이 없었지. 이젠 장점과 단점, 업적과 실적, 요점과 급소 보단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는 흐름을 더 중요시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서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예견하고 유추하길 더 좋아하게 되었지. 또 이 세상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하고 적응하며, 이 세상엔 영원한 진리도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있을 수 없고, 좋은 현상 나쁜 현상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같이 오거나 번갈아 오거나 태극 모양으로 대류처럼 섞인다는 것을 보았지.
사람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갈구하고, 사람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을 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예측 불가능한 운명에 항거할 수 없기에 인간의 꿈과 희망이 전지전능한 신을 창조했음을 알게 되었지.
이제 겨우 육십을 넘어 덤으로 인생을 살게되고 나서야 고집불통으로 내 주장만 하는데서 겨우 벗어나 이분법과 흑백 논리,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제 겨우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고 때와 장소, 보는 각도, 보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판단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지. 이젠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도 어느 정도 알고, 무조건 반대나 비평만 하지 않고 균형과 조화, 질서 화목 평화 양보 공평 같은 단어도 좋아하게 되었지. 인간만사, 얼굴이 다르면 생각도 당연히 다르고, 사랑하는 부부라도 우선 “다르다”에서부터 시작하고 양보하며 맞추어 가고 접근해 가야함을 알았지.
하지만 이제 겨우 세상을 알만하고 눈으로만 보지 않고 느낌의 가슴으로도 보고, 보이는 것만 보려하지 않고 안 보이는 것도 약간 볼 수 있고 내가 해야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겨우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채우는 것만 아니라 비우는 것도 좋아하고 이제 겨우 아름다운 소리뿐 아니라 조용한 침묵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제 겨우 혀에 단것만 좋아하지 않고 씁쓸한 씀바귀 냉이 무침, 얼큰한 콩나물국, 콤콤한 청국장도 좋아하게 되었는데.
여보게,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여, 자네들이 진짜 사랑을 알아? 자네들이 진짜 인생을 알아? 조금 알고 느끼게 되었을 땐 이미 늙어버렸을 때임을 알아? 지금 한창 힘들고 고달플 때가 황금 같은 시간임을 알아?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이 그래도 살아 볼만한 천국임을 알아? 결국 인생이란 자기 완성을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돌다리를 두드리며 걸어가는, 하지만 어찌 보면 죽음을 향해 점점 가까이 걸어가며 한편 이 세상에서 점점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임기명<엘리콧시티,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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