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에 그득한 감미로운 장미향으로 아침에 눈을 떴다. 어제가 결혼기념일이었다.
20여 년이 넘게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면서 내 마음을 흡족하게 축하한 적이 없는 남편인 줄 잘 알면서도 며칠 전부터 나는 또 마음을 두근거리며 혹시나 하고 기대하였다. 밍숭맹숭 기억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만 기억하는 것에 대해 결혼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오죽 생활이 바쁘면 하고 이해하는 여유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하는 경지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전날 저녁까지 아무 계획이 없어 보이는, 생각 없는 남편을 보고 있다 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아야지, 마음의 평정을 갖고 성숙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야지 하다가 드디어 그 날이 왔고, 역시 나 혼자 기억한 것이 여실히 드러나듯 꽃도 카드도 선물도 아무 것도 없는 참담한 아침을 맞았다.
오후 시간에 손님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리기로 했다. 내가 하는 부동산 일 관계로 꽃집을 종종 가게 되어 나는 이미 그 꽃 냉장고에 있는 꽃들을 눈앞에 보듯이 환하게 안다.
색깔별로 구분해 각 통 속에 들어 있는 장미를 보면서 가져갈 상대방을 생각하면 저절로 싱글벙글해 진다. 받는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한 송이 한 송이 정성껏 단단하고 알찬 장미를 살짝 봉우리를 가볍게 누르듯 골라낸다. 그래야 며칠을 두고 조금씩 그 속잎을 열면서 보여 주는 겹겹의 장미 모습을 즐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꽃잎이 떨어지기 전의 활짝 핀 장미의 마지막 그 처연한 아름다움까지 상상하며 골라낸 12송이 장미가 꽃 디자이너 손을 거쳐 길이를 가지런히 하고, 푸른 잎과 하얀 배비 브레스를 더하여 투명한 샐로판에 싸여 지는 순간 꾹 참고 있던 내 입은 마침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예쁘다. 아! 정말 예쁘다.” 를 연발하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12송이 장미 다발을 가득히 안고 그 가게를 나올 때는 이미 나는 행복감에 푹 젖어있게 된다. 그 꽃을 받을 사람보다도 이미 더 많은 행복을 늘 만끽하였기에 꽃 살 기회만 되면 이 꽃집을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약간 가을에 맞게 주황색과 크림색의 장미를 골랐다. 남편을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줄 결혼 기념일 카드에 금년도 이 날을 함께 지낼 수 있는 아내의 기쁨도 적었다. 인생은 만남이라고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자를 만났고 함께 의지하며 협동하며 살고 있는데 어찌 기념하지 않으랴. 어찌 그것을 남편에게만 미루랴. 하여 금년부터는 나부터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하니 마음이 개운하였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남편에게 얼른 꽃다발을 내밀었다. “Happy Anniversary!” 순간 당황해 하는 남편의 얼굴을 못 본 척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휴가로 집에 와 있는 두 아들들도 의아하여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세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순간 빨간 장미 꽃다발과 초코렛 케익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세워져있는 카드 두 장을 발견했다. 뒤따라 남편과 아들들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구동성으로 “Happy Anniversary!” 합창을 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옆구리 찔러 절 받듯이 받은 것이다.
역시 저녁은 하얀 테이블보 위의 은은한 촛불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곳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먹고 싶어하는 한국 음식들 중의 하나로 시끌벅적한 한국식당에서 지글지글 잘 익은 삼겹살을 상추에 얹어 밥 한 숟가락과 함께 된장 푹 떠 꼭 여미어 싸서 입을 벌릴 수 있는 대로 벌려 우겨 넣어 먹는 걸로 결혼기념일인 긴 하루가 끝났다. 장성한 두 아들들이 앞에 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면서.
식사 후의 포만감과 행복감은 비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미를 볼 때와 삼겹살을 포식한 후의 행복감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한현숙/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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