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을 글로 나타낼 수 없음을 안타까이 느끼며 지긋이 눈 감고 음악 속으로 내 마음을 이끈다. 바람이 창을 한번씩 흔들며 지나가는 동지섣달 겨울밤에 맑고 경쾌한 합시코드 음률에 이어 첼로의 느릿하고 나직한 음이 내 마음을 한없이 아득한 곳으로 이끈다.
가는 2005년을 앞두고 지난 일년을 회상해 본다. 작년 이맘때의 나와 지금의 나. 일년 동안 성숙해진 나의 모습을 찾아본다. 나무는 나이테로써 그 연륜을 안다고 한다. 나는 무엇으로 나의 성숙도를 알아낼 수 있을까. 사람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환경에 있든지 그 누구나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의 자신을 원하고 또한 내일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건 아직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들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은 두 아들을 기준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석 달 긴 여름 방학이 끝나면서 학교에 보낸 뒤 추수 감사절 휴가에 올 두 아들을 기다리고, 가고나면 또 겨울 방학에 돌아올 날짜를 달력에 표시하며 그리워하며, 채 한 달도 못 되는 겨울 방학동안 바쁘게 함께 지내고 간 후엔 부활절 휴가 올 것을 기다린다. 미국에는 퇴직했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전선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건강한 건지, 혹은 기력이 있어서 일하는 건지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운전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하고 있을 내 모습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된다.
금년에도 역시 크고 작은 일들이 내 삶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와 당황하기도 했고, 며칠 밤을 뒤척이며 고민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 반면에 기쁘고 즐거운 일로 한동안 행복해 하기도 했었다.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 중에는 나를 소름끼치게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희망을 갖게 해준 사람들이 역시 더 많았다. 내 능력 인정해 주고 일을 맡겨 주신 분들의 기대가 고마워서 더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남편의 외조가 더 없이 고마운 한 해였다.
내 좁은 시야를 열게 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이해하는 폭을 어쩔 수 없이 넓히다 보니 자연히 삶에 분별력이 조금씩 생긴 한 해였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선이 뚜렷해졌다. 꼭 해야 할 말과 참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까이 두어야 할 사람과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할 사람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온유와 관용이란 단어가 가진 그 훌륭한 뜻에 대해 새삼 무릎 치며 수긍하며 나 자신의 못마땅함에 대해 용서가 시작된 해 이기도 하다. 나 역시 세월 속에 지나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한때의 괴로움도, 슬픔도, 또한 기쁨과 행복도 결국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은 지혜로워져서 새해를 맞이하기를 원한다. 나로 인해 잠시나마 주위 사람들의 마음이 편해지고, 적어도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희생을 요구할 지라도. 어떤 일에도 ‘희생’이 없이는 발전이 없다. 그 희생으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가정에서, 단체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 가정이, 그 단체가 깨어지지 않고 순항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희생이란 단어가 안이한 나에게 도전이 되는 한 해로 다가온다.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 희생이 요구될 때 기쁨으로 감히 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기를 소원해 본다. 새해에는.
한현숙/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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