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그러
나 한인들이 많은 퀸즈 지역에 가보면 노인들은 주로 할 일이 없다 보니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노인회나 노인 프로그램에 참석해 이것 저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또 어떤 노인들은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가하면, 그중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또는 병원에 누워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은퇴 후 노인들의 삶은 이처럼 크게 즐거움과 보람이 별로 없는 대부분 무료한 가운데 자신만의 생활이다. 이러한 노인들의 평범한 삶을 남달리 건강한 몸으로 내가 가진 능력과 실력을 통해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없이 축복된 삶이 아닐 수 없다. 대뉴욕지구 한인상록회 사무총장으로 10년간 봉직하고 지난해 은퇴했던 주승욱(77) 목사. 그는 8순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도 쉬지 않고 남을 위해 여전히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요즈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몇몇 한인 봉사단체의 뒤를 돌봐주고 있는 업무이다. 이것은 그만큼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은퇴했지만 지금도 가만히 있지 않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하루일과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기상해 보통 밤 11시 반, 12시나 돼야 취침하는 것이 예사다. 관여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 저녁 모임이나 행사에도 자주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커뮤니티 보드7 보드위원으로 10년째, 한미합동 6.25참전 용사 기념회 부회장으로 6년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부 보건연맹 부회장을 6년간 맡아 일했고 거기다 상록회 10년, 지금은 커뮤니티센터 운영위원까지 맡고 있다. 또 이 단체, 저 단체에서 하는 영어강의도 도와주고 매주 토요일과 월요일 아침에는 ‘9시에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는 FM서울 방송프로그램을 한 시간 동안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일요일 하루만은 뉴욕한인침례교회(최창섭 목사)에서 신앙생활로 몸과 마음을 풀고 있다.
그는 젊은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많이 일을 하다 보니 개인적인 일을 할 시간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움직일 수 있는 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심 없이 나눠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바쁜 생활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진 것은 없지만 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오던 터였다. 그는 항상 최고 지휘자의 위치보다는 늘 받드는 자리에서 더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그런 은사가 있음인지 지금까지 그는 회장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항상 그 차석의 위치에서 보좌역으로 일해 왔다.
주 목사가 한인 봉사단체에 몸을 담기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도부터였다. 당시 사무총장이 한인 상록회를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하루, 이틀 사무총장을 구할 때까지만 돌봐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발을 들여놓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침 상록회에 처음 나간 날이 시에서 인스팩션을 나왔는데 처리 과정에서 “너는 여기 무슨 직책이냐?” 물어 “사무총장이다”라고 답하는 바람에 발이 묶이게 된 것이 1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그가 상록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함께 한 회장만도 6명이나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상록회에 그가 있는 동안 그래도 크게 말썽 없이 팀웍을 이루면서 잘 지내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는 상록회 10년 활동을 지난해 7월 그만두고 후에는 상담역으로 있다가 지난
해 말로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리고 올해부터 후러싱 커뮤니티 경로센터에서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상록회에서 그가 하던 일은 예산편성, 농장관리, 대 관청관계 및 시 주정부로부터 기금을 따내는 일, 프로그램 확장 등 굵직굵직한 업무는 다 도맡으면서 상록회의 기반을 구축했다.
주 목사는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지금 형편에서 무엇보다 사람들이 믿고 일을 맡기는 것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주 목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미 이런 뜻 깊은 일을 하기 위해 일찍이 과정을 밟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부터 그는 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홀트 양자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했고 침례교 신학교에서 교편생활도 했었다. 후에 사회에 나와 모 기업의 간부로 일을 했고 또 이 회사의 미국본부장으로도 일했다. 한국에서 미국 남침례회 선교부서 10여년 있다 76년에는 미 남 침례회 총회 국내선교부 소속목사로 동북부지역 아시아계 담당을 맡았으며 92년 65세로 정년 은퇴했다.
그는 일찌기 독학으로, 그리고 군대에서 영어를 익혀 미 군사고문단에 행정요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후에는 계속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6.25 동란 전에는 미국 군사고문단에, 6.25후에는 특기 통역장교로 미 보병 2사단의 정보장교(포로 취조관)로 복무한 바 있다. 앞으로 남은 생은 하나님이 부를 때까지 살아온 인생 부족하지만 더 큰 과오 없이 살고 싶다는 그는 하나님이 건강을 주어서 시력이 조금 불편한 걸 제외하고는 그나마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의 건강비결은 무엇이든 잘 먹고 잘 자고 또 분노하지 않으며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참 평화, 그리고 기도를 통한 자기
조절, 신앙고백으로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17세 때 홀로 남한에 와 누구의 도움 없이 어렵게 살다보니 한 동안은 제일 험한 벼랑까지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신앙심이 깊은 선배의 도움으로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상에 사는 것이 너무 좋고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다 좋다고 말하면서 나로 인해 누군가 도움 받았다고 하면 다 보람된 일이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 있었어도 모두가 다 관용으로 받아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생의 막바지까지 갔던 주 목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20대 때 만난 어른이 지금 96세가 되었는데 아직도 교제하고 지내는 한국의 대 기업가 그 분의 도움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그는 노인문제와 관련, 한인노인들은 비교적 건강한 생활을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사고와 차세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생활 관리를 대체로 잘해나가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노인들이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많은 육신의 활동이 필요하다. 여가선용이나 이웃하고 어울리는 일, 젊은이를 이해하는 일, 미국정책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목사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 일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병행하면 매우 유익할 것으로 본다고 조언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매일 매일 지난 40년간 써온 일기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반추한다. 이 일기는 그가 하루일과를 더듬기 위해 필요에 의해 써온 것인데 이제는 안 쓰면 무언가 빠진 것 같다며 일기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해 생활계획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매일 한 일에 대한 진단과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설계하는데 일기가 더없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인터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부지런히 또 가방을 챙겨 어디론가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여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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