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다. 이 달을 맞아 한인사회에서는 가정의 중
요성을 강조하는 행사가 여기 저기서 열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를 이루자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정이 튼튼해야 한다. 가정이 건강하려면 가정의 모체가 되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가정의 화목과 자녀들의 우애, 그리고 단합은 그 가정의 어머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오
늘날 많은 한인가정이 흔들리는 이유도 그 집안의 어머니가 중심을 잃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세월이 바뀌면서 이 시대에는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 버리고 가는 비정한 어머니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한 때 목회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은퇴한 김상한(87) 목사의 아내 전후숙(85. 엘름허스
트 거주) 사모는 가정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린 훌륭한 어머니라고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그의 자애로움과 슬기, 그리고 현명함은 가화만사성이라고, 가정의 화목은 물론 슬하에 둔 5남3녀 모두 이 사회에서 쓰임받는 인물로 살 수 있도록 키웠다.
장남은 실로암장로교회 김종덕 목사이고, 둘째 아들은 뉴욕시온성교회 장로, 셋째 아들은 예일장로교회 목사, 넷째 아들은 뉴욕한민교회 부목사, 다섯째 아들은 시온성교회 집사로 모두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고 있다. 또 첫째 딸은 실로암장로교회 권사이고, 둘째 딸은 뉴저지 성은교회 김정문 목사의 사모, 셋째 딸도 한국에 있는 신성교회 이희수 목사 사모이다.이 가정의 자녀가 모두 하나님의 종이 되어 화목하게 살고 있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씨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 가정의 질서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씨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힘이 드는 줄 모르고 키웠으며 가족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며 도우면서 잘 살아왔다는 것이다.
전씨는 지금도 아들과 딸, 며느리, 사위, 그리고 슬하의 손자, 손녀 모두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낸다. 그러다 보니 전씨의 아들, 딸 가족이 한번 모이기만 하면 너무나 다복스러워 모두들 부러워한다. 전씨의 가족은 한국에 거주하는 딸네 가족 4명을 포함, 총 32명이다. 그중 손주는 서울의 2명을 비롯, 뉴욕, 뉴저지에 13명이나 있다. 가족은 모두 생일이나 설날 등 집안의 대소사에 한 번 씩 모이는데 올해는 지난 5월8일 어버이날 전씨네 집에 모여 다함께 다복한 시간을 가졌다.
전씨는 경상도 안동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자랄 때 부모님으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고 컸다. 일제 시대, 그 어려울 때 가정이 유복한데다 부친이 개화돼 서울의 경성여자상업학교에 보내주어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할 때 그의 부친은 생일 때 꼭 선물과 마른 과일, 돈
등을 소포로 보내고 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 그래서 전씨도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 베풀며 살았다는 것이다.
남녀 구별 없이 하나같이 다 귀하게 여기며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길렀다. 그리고 집안에서 절대 큰 소리, 나쁜 욕 한번 하지 않고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자 노력했다.
말하자면 자녀를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사랑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키웠다. 그래선지 슬하의 자식들은 모두 다 매우 선하고 효성스럽게 자랐으며 학교에서도 늘 칭찬을 받았다. 한 마당에서 살던 사촌들과도 싸움 한번 할 줄 모르면서 자랐다.
이는 모두 선조 때부터 신앙가운데 자란 덕에 이루어진 것이라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전씨는 말한다. 그래선지 전씨의 얼굴은 8순 중반이 된 나이에도 걱정, 근심 하나 없이 아이들을 키운 것 같이 부드럽고 인자해 보인다. 그러나 부모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도 매우 엄격하게 자란 탓에 어딘지 엄한 모습도 얼굴에 배어 있다.
전씨는 살면서 신앙인으로서 표본이 되기 위해 늘 사명감을 가지고 겸손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랄 때 받은 교육으로 여성으로서 사회활동도 많이 했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부군이 신학교에 다닐 때 군청, 은행, 농협 같은 곳에 관리로 일했으며, 고향에서 여성청년단장, 서울에서 대한부인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 와서도 뉴욕한인 여성교회연합회 회장, 맨하탄의 ‘한길 어머니대학’에서 음악교사로 어머니들을 10년이나 가르쳤다. 결혼 당시 부군이 목회자라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안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가정을 꾸렸다. 다행히 아이들은 성적이 좋아 모두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다 시피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전씨는 목회자와 인연이 남달랐다. 할아버지도 목사인데 부군도 목사이고 시아버지도 목사, 또 아들들도 목사, 그야말로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했으니 하나님과 평생을 같이 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당시 그의 부군은 늘 성경만 보면서 설교, 기도, 심방을 하며 안동에서 교회를 25년간 시무하고 미국에 와서도 시온성교회를 개척하고 10년 동안 목회했다. 전씨 부부가 결혼한지는 5년 전 60주년 기념잔치 후 지금 벌써 65년이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이토록 해로한 것은 알고 보면 상대방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 남편들은 보통 아내 보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서로 간에 사랑과 존경심이 없으면 부부간의 애정은 지속되기 어렵다고 전씨는 말한다.
더불어 요즘 젊은이들이 사는 것에 대해 옛날과 비교해보곤 한다. 예전 여성들은 어른들한테 복종하다시피 하면서 조부모와 함께 시부모를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들을 데리고 살다 출가시키고 어른들 환갑, 진갑까지 다 해드리며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니 오히려 어른들이 “너무 고생하며 살았다”며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라” 해서 미국에 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씨는 덧붙인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생활은 핵가족 시대라 너무 편하고 안이하다고 말한다.
전씨는 8남매의 맏자부로 자신도 또 8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맏며느리로 다리가 편찮아 거동을 못하는 시조모를 만 11년이나 보살핀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이었다. 그것은 어떡하든 ‘어른을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이었다. 전씨가 미국에 온 지는 살다보니 어느새 25년이나 되었다. 그의 요즘 일과는 부군이 병환이 나 그를 간호하는 홈케어를 봐주며 간병을 하는 것으로 소요된다.
전씨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한 편인데 건강관리는 특별히 하는 것이 없고 예전부터 ‘소식’하는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몸이 건강하다 보니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젊은이들과 다름없이 고음도 나와 여전히 소프라노 음성을 낼 정도다. 지난 결혼 60주년 파티에서는 가족합창곡을 모은 CD를 만들었는데 그때 전씨가 혼자 부른 독창곡도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곱다. 전씨의 이제 남은 꿈은 항상 자손들이 모두 착하고 선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려운 가정에서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며 8남매를 올곧게 키운 그의 삶은 가정을 가진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의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전씨는 지난해 재미한국부인회가 수여한 ‘훌륭한 어머니 다복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여주영 논설위원(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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