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 유명하다. 이런 러셀이 한 때 전쟁을 주창하고 나섰었다. 침략자를 응징하자는 전쟁을 주창한 게 아니었다.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전쟁을 제의했던 건 유럽이 2차 대전의 악몽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50년대 초의 일. 서방은 필요하다면 선제공격을 통해서라도 소련이 다량의 핵무기를 비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액션을 주창했던 것이다.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가졌었다. 그런 러셀이 왜 소련 공격을 주장했을까.
소련이라는 체제,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악마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체제가 핵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보유하게 될 때 이는 인류의 재앙으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군사조치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선제공격에 의한 예방전쟁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그리고 이후 핵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한 방법론으로 거론된다.
1964년 여름 중국은 첫 핵실험 준비를 마쳤다. 핵실험 장소는 중국 서부 지역의 외딴 곳. 그 정보에 접한 당시 존슨 미국 대통령은 모종의 계획에 착수했다. 선제공격안이다.
실행에 앞서 번디 보좌관과 상의 끝에 모스크바의 반응을 떠보기로 했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결국 계획을 접었다.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5년 후.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소련이 비밀리에 미국의 의사를 타진해 왔다. 소련과 함께 선제공격을 해 중국의 핵무기 시설을 파괴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는 중소분쟁이 무력충돌로 번진 시기였다. 모택동이 이처럼 강하게 소련에 도전한 것은 바로 핵무기 때문이었다. 핵으로 무장한 중국에 대해 소련이 전면전을 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 중국의 핵을 부수기 위해 소련이 미국에 제의를 했던 것이다. 미국은 계산 끝에 ‘노’라는 답을 했다. 중국은 그 후 핵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중국 인민해방군 장성들이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지 보도로, 때문에 마침 열린 중국 공산당 6차 중앙위원회(6중전회)는 북핵 문제 성토장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중국군 장성들이다. 바로 그들이 대북 제재에 열을 올렸다는 얘기다.
어떤 제재 방안이 거론됐을까. 혹시 선제 공격론도 그 방법론의 하나로 제시된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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