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자 한국이송 사업에 앞장섰던 고 이수민 목사 영정 앞에서 부인 이승언씨가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영정 앞 편지들은 미 전국 교도소에서 한인 재소자들이 보내온 것이다.
“하늘나라서도 기뻐하실 것”
한국 ‘이송 협약’ 가입 10년 노력 올 첫 결실
미국내 한인재소자 2명이 ‘수형자 이송협약’에 따라 금년내 한국 교정시설로 이송된다는 소식 <본보 17일자 A면>에 가장 반가워했을 사람은 다름 아닌 ‘미주 자국민 보호위원회’ 이수민 목사였을 것이다.
한인사회가 외면했던 이 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매달렸던 그는 평소 “첫 이송자가 결정되면 등을 두드려 주며 ‘반드시 새로운 삶을 일궈라’는 용기를 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안타깝게도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4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지난 9월22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이 목사가 한인재소자, 특히 청소년 재소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0여년전 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내면서부터. 우연히 교도소를 방문했다가 이들의 힘겨운 수감생활을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고인은 “우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재소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듣고는 곧바로 ‘수형자 이송법’을 공부하고, 한국 법무부를 찾아다니며 한국정부에 협약 가입을 촉구했다. 또 수시로 주변 교도소들을 찾아다니며 한인재소자들을 위로했다.
마침내 한국이 협약에 가입하자, 이번에는 이송자들이 형량 만기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재활프로그램 마련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책상에는 미 전국의 교도소에서 보내온 한인 재소자들의 편지가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 어느새 수백통이 됐다. 또 자신이 파악한 재소자들의 현황과 기록을 빼곡이 적은 자료철은 책 한권 분량을 넘어섰다.
하지만 고인의 기대와 희망은 세월의 무정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70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거듭한 것이 무리였던지 4개월전 심장이상으로 쓰러진 뒤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의식도 없이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야 했다.
이 목사의 부인 이승언 여사는 “고인이 평소에도 ‘아이들이 어두운 과거를 덮고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을 자주 했다”며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고인의 뜻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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