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앙정보부(KCIA)는 한 술 더 떴다. 전두환 정권 시기에 내가 고국을 방문하자 정보부원들이 나를 미행하며 내가 방문하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공갈협박 식으로 다그쳤다. 몇몇 친구는 시말서를 써냈다며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되도록이면 한국에 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향을 다녀 온 뒤 갑자기 반한인사로 취급받았다. 당국은 내가 마치 간첩인양 친구와 친척들을 못 살게 구는 반인륜적 행동을 자행했다. 나는 세상에서 남보다 앞서 가려면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참아 왔다.
나의 두 번째 방문은 1990년 2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미 한인학자협회가 개최하는?통일에 관한 회의에 북한 학자를 초청하자는 제안을 가지고 평양에 갔다. 그 때는 아내도 동행했는데, 북경에서 비행기가 안개 때문에 묶여 이틀간 기다린 끝에 기차로 24시간 걸려 평양에 갔다. 북한 유엔대표부 대사직을 지낸 한시해씨가 ?우리를 ?접대했고 나는 한대사와 남북의 여러 가지 현안문제에 관해 4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내가 평양에 가기 전에 한대사는 당시 한국의 실세로 알려졌던 박철언씨와 싱가포르에서 비밀회담을 ?7번이나 가졌으나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됐었다. ?그래서인지 한대사는 ?매우 협조적으로 나와 깊은 대화를 가졌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내용 일부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청와대의 ?모 인사에게 알렸다. 남과 북은 이때부터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할 수 있다. 재미한인학자와 북한학자의 회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한 대사는 다음해(1991년) 평양이나 북경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이 학자회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의 세 번째 북한방문은 2000년 6월 중순경이었다. ?이때는 북한이?1994~1998년 실시한 ‘고난의 행군’ 직후여서 북한주민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워 보였다. 행인들도 힘이 없어 보였고 ?“고향의 집” 이라는 ?김일성주석 본가의 경비병들도 맥없이 잔디밭에 누워있었다. 사람마다 먹지 못해 여위고 얼굴도 누렇게 보였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방안에서 많이 울었다. 북한 요인들에게 어떻게 정치를 했길래 백성들이 저 지경이냐며 항의도 했다.
이 세 번 째 여행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정부가 지원하는 연구비로 북한 사범교육을 연구하는데 동참해 달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요청으로 평양의 김형직 사범대학과 교육과학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집필 중이던 북한교육에 관한 저서(‘Human Remolding in North Korea’) 를 위해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7년 만에 탈고돼 지난 2005년 출판됐다.
?이번 네 번째 방문은 내가 ?40여년에 걸쳐 연구해온 북한의 교육문제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북한 어린이들을 더 창조적이고, 더 지능적이고,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을 찾는 과제를 안고 평양에 갔다. 이 중요한 과제에 대한? 생각이나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그 해답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찾아 가지고 ?돌아 왔다.
이제부터 ?내 칼럼의 본론이 될 그 길에 관해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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