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체 노동자다.”
에리자베스한인교회 김준식(50)목사.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준비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 5시30분 새벽기도를 매일 인도하고 저녁 1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어간다. 낮에는 교회 일, 심방일 등등으로 무척 힘들고 바쁘게 간다. 힘든 이민목회다. 이렇게 힘든 만큼 보람도 크다. 하지만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못 한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디를 보아도 해병대 장교 출신 같지 않은 김준식목사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BE·79년)를 나온 후 대학원에 입학해 다니다 1981년 한국 해병 사관후보생이 된다. 간부후보생 66기로 후보생이 된 김목사는 3개월의 혹한 훈련을 거친 후 해병장교가 되어 3년3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한다. 제대 후 다시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 85년 경제학석사(ME)학위를 받는다. 84년부터 87년까지 서울대경제연구소에 근무하다 90년 8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도미한다. 이때의 공부는 경제학이 아닌 신학이다.
김목사는 소명을 받게 된 동기로 “서울대 다닐 때 75년부터 81년까지 캠퍼스 미니스트리를 했다. 이 일을 하면서 종교학과 주임교수인 신사훈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분은 학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기도 생활로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긴 분이다. 그 분에게서 받았던 한 학기 수업이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게 된 동기(turning point)가 됐다. 그리고 미국에 들어와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후 91년 2월부터 92년 2월까지 보스턴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밟게 됐다”고 말한다.
하버드신학대학원을 졸업(92·MTS)한 후 다시 뉴저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한 김목사는 10년만인 2002년 5월 철학박사(Ph.D.)학위를 받는다. “보스턴에서 뉴저지로 이사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한 후 92년 에리자베스한인교회 전도사로 부임했고 94년 10월 부목사가 된 뒤 96년 담임목사가 되었다. 목회를 하면서 박사과정을 할 때 포기하려했었다. 그러나 아내가 끝까지 하라고 용기를 주어 10년 만에 논문을 통과해 학위를 받았다. 모두 아내의 덕이다”라고 아내 박영실(48)사모에 그 공을 돌린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과정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김목사는 “한국에서 교수로 초빙 받았지만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로 가지 않았다”며 그 이유로 “교수는 학생들에게 마인드만 즉, 지식만 전수시킨다. 그러나 목회는 교인들의 전인격, 전생활을 책임지고 섬겨야 한다. 이것이 나를 교수가 아닌 목회자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민목회의 방향을 “영성훈련이 중요하다. 하지만 체력훈련도 중요하다. 영성을 위한 목회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체력이다.
취미로 테니스를 한다. 매주 월요일 약 3시간 한다”고. 현재 뉴저지한인교회협의회 목사부회장인 김목사는 뉴저지중부목회자연구회 회장, 미국장로교동북대회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부인 박영실사모와의 사이에 진리(아들 21세·대학4학년)와 혜리(딸 18세·대학1학년)를 두고 있으며 뉴저지 밀본(Millburn)에 거주하고 있다.
<김명욱 기자> myong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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