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크리스마스카드가 서울 친구에게서 날아왔다. 필자의 평생지기인 그는 해마다 12월 첫 주에 받아보도록 카드를 보낸다. 하지만, 필자는 크리스마스를 어영구영 넘긴 뒤 연하장으로 때우기 일쑤이고, 친구는 그마저 음력설이 돼서야 받아본다며 혀를 찬다.
해마다 12월초부터 1월말까지 필자의 허름한 사무실 벽은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카드로 장식된다. 천편일률의 문안에 서명까지 인쇄해 벌크메일(요금별납 대량우편)로 뿌린 저명인사의 카드도 있고, 깨알같은 격려의 글을 정성스레 담은 독자의 카드도 있다. 옛 동료들이 휘갈겨 써 보낸 낯익은 필체의 카드를 대하면 마치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반갑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천들만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한해동안 적조했던 친지들에게 문안하거나 신세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수단으로 더 폭넓게 이용된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절기인사(Seasonal Greetings)’라고 쓴 카드들도 많다.
지난 1843년 런던에서 사상최초로 시판된 크리스마스카드부터 비종교적이었다. 헨리 콜 경이 유명 삽화가였던 존 C. 호즐리에 의뢰해 만든 이 카드엔 일가족 3대가 웃으며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가운데 맨 앞쪽에서 꼬마가 몰래 홀짝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요즘도 그런 경향이지만, 당시 크리스마스카드들은 이처럼 유머러스한 주제 아니면 꽃과 요정 등 봄을 상징하는 그림이 성탄이나 눈 같은 겨울 이미지의 그림보다 단연 인기였다.
미국에선 1875년 루이 프랑이 최초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팔았지만 우편엽서에 곧바로 밀려났다. 20세기 들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크리스마스카드도 다채로워졌다. 종교적 이미지의 카드들이 부각됐고, 전시엔 애국을 주제로 한 카드들이 붐을 이뤘다. 젊은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스개 메시지와 만화가 그려진 카드들을 선호한다. 요즘엔 향기나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드들도 있고, 그림과 문안이 획일화 된 인터넷 무료 카드도 봇물을 이룬다.
청와대나 백악관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은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공식 백악관카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시절 백악관카드를 받은 사람은 2,000명도 안 됐지만 반세기 후인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카드를 받은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140여만 명이나 됐다.
올해 필자는 백악관 것보다도 훨씬 멋진 크리스마스카드를 경험했다. 지난 1일 스노퀄미 패스 근처의 탤라퍼스 레이크 코스를 등반했는데 산등성이를 빼곡히 메운 전나무들이 전날 적당히 내린 눈 덕분에 온통 크리스마스트리로 변해 있었다. 전인미답의 등산로에도 발목까지 눈이 쌓였다. 여름엔 이곳에 여러 번 왔지만 겨울에도 분명히 와봤었다는 생각이 엉뚱하게 들었다. 이곳 설경을 빼닮은 그림이 그려진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를 언젠가 사무실 벽에서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런 걸 ‘데자부’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날 산에서 내려오며 ‘살아있는 크리스마스카드’ 속에 한 번 더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올해는 글렀다. 필자 일행이 하산한 직후 폭설이 내려 등산로가 막혔고, 다음날 탤라퍼스 옆의 스노 레이크 코스를 오르던 두 등산객이 눈사태를 맞아 숨졌다. 멋진 크리스마스카드는 역시 겨울 산이 아닌 홀마크 가게에서 찾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가까운 산에 토요등반을 다녀온 후 친구에게 보낼 크리스마스카드를 꼭 구입할 참이다. 이번 주말을 놓치면 또 크리스마스카드 아닌 연하장을 보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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